지난 11월 8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한 말이다.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 대한 말이었지만, 이 말은 40여일이 흐른 19일 문재인 후보에게 칼날이 되어 되돌아왔다.
75.8%라는, 민주당의 목표치를 훌쩍 뛰어넘는 투표율을 얻고도 졌다. 그것도 모두의 예상보다 큰 격차였다.
가장 보수적으로 보아 투표율 74%를 넘으면 승리를 "확신"한다고 했었던 야권이다. 투표율과 야권의 승리가 정비례 그래프를 그린다는 것은 야권만의 '희망'이 아니었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투표시간을 연장하자는 민주당의 요구를 새누리당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여권 역시 그 방정식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투표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야권이 유리하다는 보편적 이론은 18대 대선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세였던 투표율이 처음으로 반등하며 10년 전 투표율을 너끈히 제꼈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은 일단 뒤로 두더라도, 문 후보가 약속했던 '정의로운 결과'는 아직 먼 미래였다.
"개표 끝까지 보겠다" 민주당도, 진보정당도 집단 '멘붕'
18대 대선의 결과를 놓고, 민주통합당을 포함해 야권 전체는 사상 초유의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모두가 승리를 예측했던 지난 4.11 총선에서 패배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전국 종합 야권의 득표수는 새누리당보다 많다"는 자위의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렸었다.
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일 밤에도 한 민주당 관계자는 "끝까지 개표 상황을 보겠다"고 말했다. "아직 (패배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목소리는 반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 19일 18대 대선에서 사실상 패배가 확정된 뒤, 서울 구기동 자택을 떠나 영등포의 민주당사로 향하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뉴시스 |
진보정당의 한 관계자는 "꿈에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관계자는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다고는 못하지만, 이렇게 큰 표차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100만이라는 표차는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이 "선거를 읽고 대비하는 전통적인 매뉴얼이 완전히 무너졌다"며 "야권이 4%포인트 정도 진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크고 많은 숙제를 안게 됐다"고 평가한 이유다.
대선 패배 책임론과 계파 갈등 뒤얽힐 민주당, 이번 선거가 남긴 숙제 풀 수 있을까?
"앞으로가 더 무섭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멘붕이 덜한' 야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앞에 놓인 숙제는 엄청난 양인데, 그 숙제를 풀어야 할 민주당은 당장 내일부터 사실상의 해체 수순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보이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현재 민주당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지도부조차 없다. 이해찬 전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쇄신'이라는 당 안팎의 거센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이미 지난달 18일 사퇴했다. 다른 지도부도 함께였다.
빠른 시간 안으로 새 지도부를 선출해야 하는데, 당권을 둘러싼 갈등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론 공방과 겹쳐져 극단적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높다. 대선이 끝나기도 전부터, 민주당 안팎에는 "새 대표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한 손으로 꼽기 어렵다"는 말이 돌아다녔다.
대선 패배로, '문재인 후보'를 만들었고 선거 기간 동안도 사실상의 핵심 역할을 했던 친노 세력은 또 한 번 '폐족(廢族)'이 되겠지만, 친노가 사라진 자리에서 정계개편이라는 '빅뱅'을 건설적으로 끌어나가며 재기의 발판을 다질 리더십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민주당의 앞날은 말 그대로 중구난방, 자중지란이다."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도 "이긴다"고 했던 한 민주당 핵심 관계자의 마지막 넋두리였다.
안철수, '제2의 박근혜' 되며 야권 평정할까?…"확실한 건 내일의 암흑"
이번 대선 내내 야권의 분위기를 쥐고 흔들었던 안철수 전 후보는 어떨까. 민주당 내 비주류 일부는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를 중심에 놓고 새판짜기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본인을 '새정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 안철수 전 후보는 19일 투표를 마친 뒤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의 역할론이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대두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안철수 메시아론'은 위기 때마다 당을 구했던 박근혜 당선자가 쌓아 온 '스펙'과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안철수의 '민주당 상륙작전'을 막을 힘도 지금의 민주당엔 없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진보와 보수가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모아 결집했던 이번 선거의 결과는 보수 후보가 헌정 사상 두 번째로 과반이 넘는 득표율을 얻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후보직에서 사퇴한 뒤 나름 '열심히' 문재인 후보를 도왔던 안 전 후보가, 진정한 야권의 '메시아'가 되기에는 야권의 성적표가 너무 참담하다.
이에 한 정치권 인사는 "안철수 전 후보가 친노가 숨어버린 민주당을 접수할 확률도 있지만, 민주당이 세력별로 쪼개지면서 몇 개의 당으로 분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지금 확실한 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암흑이 펼쳐졌다는 사실 뿐이다." 18대 대선 결과를 받아 든 야권을 기다리고 있는 내일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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