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불교역사박물관에서 열린 '2009전국합동위령제'에 참석한 한 유족은 정부에 이같이 쓴 소리를 쏟아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한국전쟁유족회),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범국민위원회(학살규명범국민위)가 연 이 날 위령제에서 이들은 "(희생자가)어떻게 죽었는지라도 알고 싶은데,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며 "유해 발굴 특별법 제정과 학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 희생자에 대한 명예 회복 조치를 해달라"고 촉구했다.
▲ 14일 오후 조계사에서 '2009전국합동위령제'가 열렸다. ⓒ프레시안 |
"'과거사 규명'신청자 적어…'2년 연장' 가능한데 정부는 모르쇠"
이날 위령제에 모인 유족들은 500명 가량. 이들에게 시간은 많지 않다. 전국합동위령제 준비위원회 오원록 위원장은 개회사에서 "위령제를 준비하며 작년에 왔던 유족들에게 연락해보니 몇 분은 세상을 떠나셨다"며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여기 계신 분은 먼저 떠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정작 이 일을 해야 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내년 4월을 끝으로 업무를 종료한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4년간 8229건의 사건을 해결했고 이 중 대다수(3592건)는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었다. 그러나 "전체 희생자 유족 가운데 실제로 과거 규명을 '신청한' 사람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진실화해위가 '집단희생규명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음에도 신청자가 적었던 이유는 접수 시행일이 2005년 12월 1일부터 이듬해 11월 30일까지로 매우 짧았다는 데 있다. 전남 무안 학살 사건 유족 정회선 씨는 "홍보가 부족해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유족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또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암암리에 이뤄졌던 탄압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유족들이 많다"며 "과거를 드러낼 수 있도록 추가 신청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원록 위원장은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제 겨우 빙산의 일부만 세상에 드러났을 뿐"이라며 "정부, 국회는 미신청 유족들의 추가 신청, 유족 배상 등 후속 조치를 조속히 추진해달라"고 촉구했다.
▲ '한국전쟁유족회'가 지역별 유족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 |
유족들은 이날 위령제에 앞서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밝혔다. △(과거사 규명) 추가 신청에 대한 법 개정 △민간인 피학살자 및 그 유족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 △'과거사연구재단' 설립 △유해 발굴 특별법 제정 등이다.
한국전쟁유가족회는 기자회견에서 "현 정부와 언론의 무관심이 심하다"며 "2010년부터 국제사회에 여론화시킬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이들은 "유엔(UN)에 직접 호소하거나 미국 백악관 앞에서 장기간 농성을 해야 한다는 합의를 봤다"며 국내 여론의 관심을 호소했다.
진실화해위 위원장 위령제 불참에 유족들, "과거사, 이념 문제 아니다" 강조
위령제에 모인 유족들은 이번 달 새로 취임한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제1대 진실화해위 위원장 송기인 신부, 제2대 위원장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최근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임기를 마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참석했으나 이영조 위원장은 불참한 채 설동일 사무처장이 추모사를 대독했다.
▲ 송기인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합동위령제에서 기도문을 읽고 있다. ⓒ프레시안 |
오원록 위원장은 "합동위령제 사상 최대 규모 유족이 모이는데 현 위원장이 참석하지도 않는 것은 유족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역대 위원장들은 위령제마다 참석했는데…" "위원장이 참석해서 사건 해결에 대한 방향을 말해주어야하는 거 아니냐"며 유감스러워했다.
이영조 위원장은 2005년 한나라당의 지명을 받아 진실화해위의 상임위원이 된 뒤 이번 달 2일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위원장은 보수 성향인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에서 사무총장으로 활동한 경력과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한 이력이 있어 "진실화해위가 보수화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국전쟁유족회는 진실화해위 위원장 교체와 함께 불거져 나온 '좌·우 논란'을 경계하며 "이것은 이념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위령제에서 만난 한 유족은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친북·좌파와 관련이 없는데도 좌경시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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