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공원 사업은 2015년 양산 출신 독립운동가 우산 윤현진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역 항일독립운동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재조명과 이에 따른 선양사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마련됐다.
이에 시는 국비 18억 원, 지방비 42억 원 총 사업비 60 억을 들여 교동 306번지 춘추공원 내 4102㎡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기념관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시는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2019년 중기지방재정계획 등 행정절차를 마무리하고 공유재산관리계획 심의와 부지매입을 거쳐 내년 5월쯤 착공해 2020년 준공할 계획이다.
양산시의 현재 독립운동가 포상현황은 윤현진, 서병희 선생의 독립장을 비롯해 애국장 6명, 애족장 18명, 건국포장 4명, 대통령 표창 13명 등 총 43명이다.
그는 7세때 만성제서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15세 때 구포의 사립학교인 구명학교을 졸업 후 1914년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김성수, 신익히, 송진우 등과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항일눈동에 앞장섰다.
그후 그는 1916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와 대동청년단을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1917년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사재를 털어 경남은행을 창립해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운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에서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3월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 안창호, 이시영, 이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승만 등과함께 대한 임정을 조직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됐다. 재무차장에 선임된 그는 임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고향의 사재 30만원(현재 300억)을 헌납했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해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결의 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국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윤현진은 상하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일본아사히신문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정패망이라고 논평했다.임정부는 윤현진 공로를 높이 평가해 국장으로 치루고 상하이 정안사의 묘지에 안장했다.
양산에서는 1959년 국민의 이름으로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해 추모했으며, 그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됐다. 유해는 1995년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됐다.
현재 양산시립박물관에는 윤현진의 손자 윤석우가 기증한 친필편지와 인장, 사진 등이 소장되어있다.
김일권 양산시장은 "독립공원이 조성되면 인근의 충렬사, 현충탑, 윤현진 선생 흉상 등과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현충 시설로서의 우뚝설것"이라며 "앞으로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정신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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