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 스마트, 빅데이터, AI, 플랫폼 경제... 유수의 대기업 전략 보고서에서부터 지자체 마을 축제에까지 침투한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얘기다. 우스갯소리로, "모든 부처 보고서 앞머리엔 4차산업, 스마트, 빅데이터가 붙어 있다"는 말이 돌았었다. '규제 완화 = 일자리 창출'은 수학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방직기를 부수는 노동자 취급을 받았다.
정부가 기업들이 요구해 온 공적 데이터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플랫폼 경제' 구축을 위해서라고 한다. 플랫폼 경제는 자본주의의 미래일까? 아마 그럴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의 미래이지, '사람'의 미래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에게 안겨주는 '공공 빅데이터'나, 공룡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플랫폼 경제'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까? 100명이 할 일을 1명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기본 소득과 로봇 노예제가 대안이라고?
많은 이들은 자본에, 기업에 시민들의 재산을 빌려주면 '착한 용도'로만 사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기술 진보'라고 믿는 것들, '일자리의 보고'라고 믿는 것들이, 대부분 인력과 비용을 줄이는 데 활용될 것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종종 잊는다.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이 정부 주도의 데이터 혁명, 이를 통한 플랫폼 자본주의 고도화에 관한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이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편집자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지배 및 분배 모델
'혁신성장'이 데이터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정부는 판교 스타트업캠퍼스에서 데이터 전문 인력 5만 명 양성을 국가가 지원하고, 빅데이터전문연구센터를 6곳으로 확대하며, 국가공인 데이터 자격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데이터 기술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데이터 경제 활성화 방안'에 올해 예산은 5068억 원이 편성됐고, 2019년에는 1조 원을 투입한다.
이 계획에는 청년 대상 실무 중심의 빅데이터 전문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청년인재 일자리연계' 사업으로 2022년까지 9000명을 양성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인력양성 전체에 예산의 대략 절반 정도가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언뜻 일자리 정책 비슷하게 보이지만, 인력 양성은 '패키지형 R&D 체계'의 일환이다. 기획재정부는 과거처럼 핵심기술 개발에 예산을 배정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인력양성, △제도·규제 개선, △민간 참여방식 등도 R&D 정책에서 함께 고려하는 '패키지형 R&D 체계'를 'R&D PIE(R&D Platform for Investment & Evaluation)'라고 부른다.
R&D PIE의 주요 내용으로 기재부는 1) 공공데이터 개방, 2) 인프라구축 및 인재육성, 3) 자율주행차 보급을 위한 도로 인프라 구축, 4) 친환경 수소를 만들 수 있는 시설 및 유통체계 구축, 5) 태양광 시설 설치 지원, 5) 빅데이터와 AI 기반의 스마트팜 확대, 6) 데이터 기반 스마트시티 구축, 7) 사물인터넷(IoT) 기반 스마트팩토리 지원, 8) 공공분야 드론 활용 등을 들고 있다.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대안에너지, 드론산업 등 개별 영역들이 플랫폼 경제 구축이라는 목표 아래 제시된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점은 '공공데이터 개방'과 '인력 양성'이 데이터 관련 R&D PIE의 중요 과제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공공데이터 개방은 데이터 관련 제도 개선과 규제완화의 핵심적 내용이다. 민간 참여 역시 탈규제와 마찬가지로 패키지형 R&D 체계의 중요한 특징인데, 정부는 전문성이 필요한 인공지능(AI) 및 빅데이터 등 응용기술 분야에서는 민간전문가와 기업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미 지난달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자율협력주행산업발전협의회와 스마트시티 개발을 위한 시범도시 지원단이 출범했다.
분배의 개선 없는 산업정책의 역진성
데이터 관련 R&D PIE는 정부의 혁신성장이 탈규제 정책만이 아니라 재정을 투입하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별로 새롭지 않다. 가까운 예로 창조경제도 탈규제와 재정 투입의 결합이었다. 정작 새로운 점은 정부가 데이터에 눈을 돌리고 플랫폼 경제를 지향하는 R&D PIE를 전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플랫폼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데이터 중심 혁신성장은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가? 국민의 경제적 삶은 과연 나아지게 될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분야의 혁신경제가 진정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어떠한 형태를 취해야 할까?
산업정책의 경제적 효과는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에 대한 기여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와 소득분배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분배구조, 고용과 소득의 탈동조화(de-coupling), 조세의 재분배 기능이 미약하거나 심지어 역진적인 상태가 온존하는 산업정책은 오히려 역진적인 소득분배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 재정을 자본축적에 도움을 줄 R&D에 투하한다는 것은 일단 과세 자원의 분배 차원에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재분배이며 역진적일 수밖에 없다. 규제완화는 그 자체로는 재정이 투하되지 않지만 그 효과가 공공재의 감소와 자본수익의 증대를 의미할 때 마찬가지로 역진적인 효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1990년대 신자유주의의 '바닥을 향한 질주'의 시대에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좌파는 산업정책에 대해 침묵하고 분배정책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에너지 전환의 관점에서 '그린딜(Green Deal)'이 새로운 산업정책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에 유럽 좌파에 고유한 산업정책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물론 분배의 개선 없이 추진되는 산업정책도 결과적으로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어 임금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역진성이 완화된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 좌파는 산업정책의 정책적 타당성 기준을 일자리 창출에 맞췄다. 그래서 국가재정이 조금이라도 투하되는 산업정책에는 언제나 이로 인해 창출될 일자리 개수가 얼마라는 선전이 따라붙었다. 물론 그로 인해 초래될 산업 변화가 총고용량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오직 새로운 산업분야에서 생겨날 일자리에 대한 예상만이 산업정책의 타당성을 위한 지표로 제시되곤 했다.
정부의 데이터 관련 R&D PIE, 나아가서 R&D PIE 10대 융합과제 전체에 대한 홍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정부의 홍보는 혁신성장이 만들어내는 일자리 개수만 홍보할 뿐, 일자리 총량 전체에 미칠 효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하지만 어떻게 선전하든, 그 분야에서 신규 일자리가 얼마나 생겨나던, 총고용량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R&D PIE는 조세 자원을 아래로부터 위로 재분배하는 것이고, 만약 이로 인해 일자리의 급격한 감소가 일어난다면 R&D PIE의 역진성은 한층 더 심각해진다.
플랫폼 경제와 일자리, 플랫폼 경제와 소유의 집중
정부가 추진하는 데이터 기술 R&D PIE의 목표는 플랫폼 경제의 수립이다. 플랫폼 경제를 좁은 의미에서의 플랫폼 기업들과 등치시킨다면, 고용 효과는 오히려 역진적이다. 대표적 플랫폼 기업인 구글은 약 6만 명, 페이스북은 약 12만 명의 직접 고용 인력을 거느리는 반면에, 케인스주의가 최정점에 달한 1962년 당시 전성기의 AT&T는 56만4000명, 엑손은 15만 명, GM은 60만5000명의 피고용인이 있었다. 페이스북이 190억 달러에 인수할 때 왓츠앱의 피고용인이 55명이었고, 10억 달러에 인수한 인스타그램은 13명의 직원만 있었다는 사실과 대비해 보면, 첨단 기술기업이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가 허망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미국에서 디지털 경제는 현재 사기업이 생산하는 부가가치의 약 6.8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노동력의 2.5퍼센트만을 고용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을 가장 먼저 시작하여 가장 많이 탈산업화되었음에도 미국의 제조업은 디지털 경제보다 4배나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피고용인 숫자만이 디지털 전환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지표는 아니다. 디지털 전환이 전체 고용량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야 한다. 여전히 논쟁 중인 주제이지만, 여기에는 낙관론보다 비관론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미국 직업의 절반 정도가 자동화될 수 있다고 예측한 프레이와 오스본(2013)의 연구와, 2015년에서 2020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510만 개의 일자리 감소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 세계경제포럼(WEF)의 '고용의 미래' 보고서(2016)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데이터를 수집, 분석, 활용하는 플랫폼 경제는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추동하고 생산비용 절감 효과를 낳는다. 생산비용 절감에는 단지 자원 절감만이 아니라 노동력 절감까지 포함한다. 물론 GE나 지멘스 같은 산업 플랫폼 기업들의 현재의 주력 업무는 제조 기술의 급진적 변형보다 가동중단 시간의 절감과 과잉설비 축소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제조업이 중국의 부상 이후 만성적인 과잉설비 및 과잉생산 상태라는 점에 기인한다.
현재 GE나 지멘스의 산업 플랫폼은 설비를 축소하고 비용을 낮추어 자국 제조업의 가격경쟁력을 키우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과잉설비의 축소라는 단계를 거치고 나면 산업 플랫폼은 자동화와 노동력 절감에 본격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데이터 중심 R&D PIE가 추구하는 목표인 플랫폼 경제를 고용 창출과 연관시키는 것은 그저 홍보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중소기업이 일자리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서 데이터 중심 R&D PIE를 일자리와 연관 짓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중심 경제'라는 기조와 논리적 일관성만을 가질 뿐이지 사실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며 합리적 전망도 아니다.
산업정책의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자리 증감만이 아니라 경제구조에 미치는 영향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데이터 기술 R&D PIE가 성공적으로 완결되었을 때 경제구조는 어떻게 바뀔까? 기재부는 그 목표를 플랫폼 경제의 수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플랫폼 경제는 매우 중립적인 표현이고 그 실제적 귀결은 플랫폼 자본주의일 것이다. 플랫폼 자본주의란, 실생활 데이터와 산업 데이터가 집적되는 인터넷 인프라인 플랫폼을 소수의 독점기업들이 소유하고 빅데이터를 무상으로 활용하여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지식 지대(knowledge-rents)를 획득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 축적 방식이다.
플랫폼 경제는 사용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플랫폼 기업의 지식 지대가 그만큼 커지는 네트워크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플랫폼 기업들에게 데이터의 집적은 사활을 건 문제이며, 플랫폼에서 어떤 서비스가 제공되고 어떤 사람들이 연결되는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따라서 데이터의 추출과 이용이야말로 플랫폼의 고유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 중심성(centrality of data)이야말로 플랫폼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이다.
네트워크 효과가 플랫폼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동학이기 때문에 플랫폼 기업은 필연적으로 거대화·독점화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플랫폼 자본주의의 세계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들로 채워져 있다. 디지털 의존 비즈니스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소유하고 필요로 하는 기업들에게 임대하는 클라우드 플랫폼(cloud plattform)의 세계도 아마존웹서비스(AWS)나 세일스포스(Salesforce)가 독점적 지위를 형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산업 플랫폼' 영역에서는 미국과 독일의 제조업을 각각 대표하는 GE와 지멘스가 각각 프디딕스(Predix)와 마인드스피어(MindSphere)라는 플랫폼으로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고, 글로벌 초독점 지위를 둘러싼 경쟁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독점화 경향은 네트워크 효과에 의존하는 플랫폼 기업의 이윤 창출 메커니즘의 필연적 결과이다. 정부의 데이터 R&D PIE의 목표가 플랫폼 경제의 수립인 한에서 중소기업이 설 자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아울러 플랫폼 협동조합이든 공공플랫폼이든 이와 같은 독점화 경향 속에 노출된다. 네트워크 효과를 추구하는 플랫폼 경제의 경쟁관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와 같은 대안적 플랫폼도 시장 경쟁을 통해서이든 법률적 보호에 의해서든 스스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플랫폼 경제가 전통적인 제조업 자본이나 일반 소비자에게 이제는 소유의 시대가 끝났고, '소유권이 이전되는 상품 생산'에서 '사용료가 부과되는 서비스 생산'으로 물적 생산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웅변하고 있지만, 정작 플랫폼 경제 자체는 소유의 종말이 아니라 소유의 극단적인 집중을 뜻한다. 경제 전반에 강력한 힘을 미치는 플랫폼 자체를 극소수의 플랫폼 기업이 소유한다. 사태를 뒤집어 말하자면, 디지털 활동을 제공하는 다중의 플랫폼 소유권으로부터의 배제가 데이터의 집적, 분석, 활용에 대한 플랫폼 자본의 사적 전유의 전제조건이다.
데이터 수집과 분석은 플랫폼 기업과 솔루셔니스트들이 찬양하듯이 갈등이 없거나 자동화된 과정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데이터는 유용해지려면 표준화된 형태로 정돈되고(cleaned) 조직되어야 한다. 플랫폼 자본이 데이터를 정돈하고 조직하는 사회 인프라를 소유한다는 것은 플랫폼 자본이 사회를 통제한다는 뜻이다. 진행 중인 빅데이터 혁명은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플랫폼 자본에게 통째로 맡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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