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와 예술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다. '예술의 고장'인 전북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소신과 철학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인들을 찾아 작품 세계와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시인이다.
지난 10월 6일~7일 이틀간 전북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씨어터 애니 소극장에서 ‘이 가을, 삼례에서 시를 읽다’ 시(詩) 강연 차 딸과 함께 전북을 방문, 독자들과 ‘아름다운 동행’에 나선 천수호 시인을 만나봤다. /편집자주
■ ‘나를 돌아보는’ 인문학 문화콘텐츠로 인기
최근 우리 사회의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인문학이 문화콘텐츠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자체와 지역 도서관 등에서 펼쳐지는 각종 강연에서 인문학은 인기 만점 주제로, 관련도서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종종 이름을 올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박해진 세상에 항변하듯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들. 하루하루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아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이런 사회 현상 속에 인문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길잡이가 돼가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특히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을 펼치고 있는 도서관이 지역 인문학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제 또한 다양해졌고, 대상도 남녀노소 나이 구분없이 '작가와의 만남'에 적극적이다.
인문학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마주하며 ‘나다운 삶’을 꾸리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
인문학의 다양한 종류 가운데 시 장르가 인기 만점이다.
비교적 짧은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들으며 내 생각을 가만가만 꺼내 볼 수 있고, 내 안에 생각을 정리하는 것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로 문단 데뷔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鯫), 잉어 추(鱃), 쏘가리 추(鯞)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멩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 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鯫, 鱃, 鯞만
자꾸 잡아 올린다
천수호 시인의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다
천 시인이 39살 늦은 나이에 발표한 독특한 제목의 시다.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에 남편은 너무 좋아 펄쩍 뛰었지만 정작 본인은 두렵고 긴장되었다고 회고한다.
경북 경산에서 1남 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난 천 시인은 어릴 적엔 가정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순한 아이였다. 하지만 감성적이었으며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사물을 더 깊고 풍부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는 ‘축복’이 아닐까싶다.
천 시인은 신춘문예로 데뷔한 후 ‘아주 붉은 현기증’과 ‘우울은 허밍’이라는 2권의 시집을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2권의 시집 외에 시인의 어머니와 함께 시를 엮은 시집 ‘저 산 간다 저 산 잡아라’라는 시집도 펴내 화제를 뿌렸다.
“글 쓰는 게 재미있다는 87세인 어머니는 요즘도 저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주세요. 그게 유일한 삶의 낙이신 듯해요”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 수준의 학력인데도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글 솜씨가 좋아 주위 사람들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단다.
“제가 어릴 때부터 사물에 대한 연민이 많았어요. 위태로운 것, 순간적인 것,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연민이 세상에 대한 저 나름의 이해법이었죠. 이것이 지나쳐서 늘 사람들에게 지적받기도 했죠.” (미소)
그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특히 중 3때 중1 후배들에게 과외를 가르칠 정도로 수학을 잘해 ‘수학언니’라 불리기도 했다.
공부 잘한 그가 인문계에 진학하는 건 당연했겠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 고교에 진학,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 아르바이트로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잠깐 일한 적도 있다. 유난히 허약해 그때 접착제 냄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는 “내 체력으로는 육체로 하는 일보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어린 판단을 했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수년간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뒤늦게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한다면, 평소 존경하던 이성복 시인의 제자로 석사 입학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문학의 길보다는 삶의 길을 더 명료히 일러주는 은사님이 계신다는 것은 늦은 공부에 대한 넘치는 보상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박사 과정에서 남진우 시인의 제자가 되는 겹 축복은 평생 감사해야 할 크나큰 사건이라고 한다.
요즘 가끔 동창들을 만나면 “학창시절 수학을 너무 잘했는데 어떻게 시를 쓰는 문학도가 되었을까” 신기해하기도 한단다.
천수호 시인은 현재 명지대와 단국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고 나누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행복하다.
그러나 “아이 키우며 일하느라 시에 대해 몰입하지 못했던 시간이 길어져서, 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그에게 시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깊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의 중요한 모티브”
천수호 시인에게 가족,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라는 시도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에서 태어난 시다.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 당신,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눈길로 //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중에서>.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가 하루는 저를 보면서 편안하면서도 야릇한 웃음을 웃는 거예요. 그 때 저를 보고 ‘수호씨’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놀랐어요.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저를 연인으로 생각하신 거예요. 아버지가 다섯 명의 딸 중에서 저를 가장 먼저 지웠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죠.”
큰 언니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도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3년 전 남편의 이른 명예퇴직 소식을 듣고 '온 몸에 화살을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백수광부의 처'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 시인으로 낯 설은 연극무대에도 당찬 도전
‘누가 연극을 두려워하랴’
천수호 시인은 낯 설은 연극 무대에도 섰다.
2012년 1월 16일 천수호 김상미 김영애 김산옥 조명 등 여성 시인 5명이 기성 배우들과 함께 정통 연극 무대에 선 것.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당신보다 나이도 많잖아. 어떻게 나를 ‘개 무시’할 수 있어? 시 오래 쓴 게 유세야? 시 10년 이상 쓴 애들은 그만 써도 된다고 생각해.”
등단한 지 4년밖에 안 된 김영애 시인이 20년이 넘은 김상미 시인을 몰아세운다.
청초한 시를 쓰던 여성 시인들이 반복되는 일상의 불안과 문단의 하극상을 다루어 주목을 받았던 연극이다.
평소 친하던 김상미 시인과 최치언 작가가 ‘시인을 무대에 세워보자’는 데 의기투합해 시작한 이 연극은 천 시인의 삶에서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친 시인은 진보적 작가모임인 ‘한국작가회의’ 소속으로 지난 정부 시절 문화인 블랙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했다. '문재인 지지 1만 명 예술인'이라는 이유다.
또한 이 단체의 회보 편집위원장을 2년 맡기도 했다.
“시는 부조리에 저항한다.”라고 했던가. 세월호 시낭송에 나가 시대의 아픔을 보듬기도 했다.
한국문예창작학회 일원으로 지난 7월 16일 일본 동경대 고마바캠퍼스에서 개최된 '2018 일본국제문학심포지엄 및 한일시인교류회'에 침석하는 등 문학교류 활동에도 열심이다.

■ “삼례는 유서 깊은 고장”...시 강연 차 전북 두 번째 방문
“이곳 삼례는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라지요. 조용한 마을인데 힘이 느껴집니다.”
삼례는 처음 왔지만 완주는 두 번째 발걸음이라 한다.
전북의 첫 이미지는 차분하고, 깔끔하고, 품격 있는 도시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특히 있는 그대로가 마음 넉넉하게 하는 것 같아 더 자주 찾을 것이라 한다.
천수호 시인은 지난 7월 완주 둔산영어도서관에서 ‘시인들과 함께 2018년 길 위의 인문학 함께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해 ‘시로 휘게(Hygge)하다’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특강 주제인 ‘휘게(Hygge)라이프’는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을 즐기는 삶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날 천 시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즐거움,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시 속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전국 곳곳에 시 강연을 다니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걸 실감한다고 한다.
마을마다 운영하고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의 ‘시 강연’ 초청이 많아졌다고. 군부대에서도 강연 요청이 많아질 정도로 인기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소설은 길게 써야 되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비해, 시는 짧아서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관심과 호기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 “시인으로 불릴 때 가장 행복...그만큼 시를 사랑하니까요”
“시집은 소설처럼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죠. 처음부터 읽으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으나 거기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지요. 그래서 시집을 읽는 사람은 마음이 가볍죠. 한 편 정도만 마음에 들어도 그 시집을 읽은 셈이 되니까요....”
천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시에 대해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주로 재미있는 시를 많이 준비한다. 특히 노래와 동영상도 곁들인다.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를 잔잔하면서도 내공 있는 색깔로 낭독한다.
...
쉴새없이 취해야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저는 ‘시인’으로 불릴 때 가장 행복하죠. 그만큼 시를 사랑하니까요”
처해진 삶을 연민과 포옹으로 따스한 시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천수호 시인은 ‘시의 전도사’다
‘이 가을에 삼례에서 시를 읽은’ 그가 딸과 함께 한 편의 추억을 쌓으며 삼례역으로 향하는 발걸음 자체가 한 편의 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