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제는 남강 변 망경동 역사공원에 세워진 파성 설창수 선생의 흉상앞에서 김상철 경남과기대 명예총장, 경남과기대 동문인 문병욱 고려병원 원장, 조경학과 강호철 교수, 주강홍 한국예총 진주지회장, 김우연 진주미협 지부장, 서소연 더불어민주당 진주을 지역위원장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존 추모제는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총동창회에서 8년 전부터 진행했으며, 올해 처음으로 진주지역 문화예술단체가 동참했다.
설창수 선생은 경남과기대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자랑스러운 진농·진산인으로’ 2010년 선정되기도 했다.
개천예술제는 1949년 정부 수립의 자주독립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종합예술제로 지방 문화예술 제전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파성 설창수 선생의 제1회 개천예술제 취지문은 민족혼과 예술을 접목했다. 취지문에서 설창수 선생은 “하늘과 땅이 있는 곳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인류의 역사가 있는 곳에 문화의 꽃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우주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은 문화의 또 한 겹 그윽한 꽃이요, 예술이 없는 세기에는 향기와 참다운 인간 정신의 결실이 없는 것이다... 여기 독립된 1주년을 길이 아로새기고 엄연하게 되살아난 겨레의 아우성과 마음의 노래와 그 꽃의 일대 성전을 사도 진주에 이룩하여 전 영남의 정신으로 개천의 제단 앞에 삼가히 받들어 이를 뜻하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설창수 선생은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독립의 기쁨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예술제 탄생은 민족혼 정립과 진주 문화예술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개천예술제는 전국 각 지역 문화예술제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설창수 (1916∼1998) 선생은 1916년 1월 16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1937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9년 리쓰메이칸대학 예과를 중퇴하고, 1942년 니혼대학 법문학부 예술과를 중퇴했다. 이후 일제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 1946년 경남일보 주필 겸 사장을 맡았으며, 좌익 문학단체에 대응하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했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창명 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49년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예술제로 변경)를 창시하는 등 60여 년간 진주지역 문화예술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총선에서 6년 임기의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정계를 떠났다. 이후 군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독재 타도에 앞장서기도 했다. 1951년 이후 전국을 돌며 223회의 시화전을 열었으며, 1972년 일본에서도 2차례 열었다. 그는 700여 편의 시, 100여 편의 수필, 8편의 희곡을 남기는 등 현대 진주지역 문화예술계의 개척자, 선구자로 남아있다.
1959년 제1회 눌원문화상을 비롯하여 진주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독립유공상, 건국훈장 애족상(1990), 은관문화훈장(1990), 예총 예술대상, 향토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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