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대상은 복재품 등 포함한 독립선언서, 양산의 독립운동가 관련 유품, 태극기, 권총 등 무기류, 3.1 만세운동 사진 자료 및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유물 등이다.
박물관은 접수된 유물을 자세히 검토해 박물관의 구매목적과 부합하는 유물만 한해 유물평가심의회를 거쳐 구매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특히 '양산의 3.1만세 운동' 특별전에는 양산이 낳은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님의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바친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룬다.
양산출신인 윤현진은 자는 명구 호는 우산 이며,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임정)에서 내무위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7세때 만성제서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15세 때 구포의 사립학교인 구명학교을 졸업 후 1914년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김성수, 신익히, 송진우 등과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항일눈동에 앞장섰다.
운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에서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3월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 안창호, 이시영, 이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승만 등과함께 대한 임정을 조직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됐다. 재무차장에 선임된 그는 임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고향의 사재 30만원(현재 300억)을 헌납했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해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결의 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국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윤현진은 상하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일본아사히신문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정패망이라고 논평했다.
현재 양산시립박물관에는 윤현진의 손자 윤석우가 기증한 친필편지와 인장, 사진 등이 소장되어있다.
신용철 박물관장은 "내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조명하는 다양한 자료가 발굴되길 바란다"며 소장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
한편, 박물관은 올해 상반기에도 황산역 관련 자료, 양산지역 반닫이 등 100여 점의 유물을 구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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