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간 수교가 된다면 냉전 구조의 절반마저 해체되고 동북아질서가 새판을 짜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그렇다면 대북 적대를 전제로 한 분단체제의 토양도 자양분도 없어지기 때문에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처럼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 사회가 분단체제이지만 마음 놓고 경제에 주력할 수 있다는 논리를 동원하거나 그런 사회갈등을 이른바 남남갈등으로 정당화하면서 제법 시간을 끌 수도 있다. 그때 깨어있는 사람들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13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 프레시안 협동조합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 '남북‧북미 화해 시대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기조강연을 통해 북미 관계의 진전이 분단체제를 와해하고 나아가 동북아의 냉전관계 해체를 추동할 수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앞선 북미 간 협상과 6.12 싱가포르 합의를 비교하며 "이번(싱가포르 합의)에는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약속했다. 그것은 군사적으로 북한을 압박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북미 간 핵 협상 사례를 보면 모든 합의서의 1항은 북한의 비핵화, 2항은 미국의 경제지원 또는 수교 협상에 대한 개시 가능성이었다"며 "반면, 이번 합의에는 미국과 북한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을 하기로 했다'고 적시했다"고 강조했다. 북미가 싱가포르 합의를 통해 사실상 '수교' 약속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정 전 장관은 "적대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로 넘어간다는 말은 '수교'라는 표현만 안 썼을 뿐이지 수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비핵화, 북미수교, 평화체제 구축이 삼위일체로 시행된다면 북핵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물론 조금 우여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밀물과 썰물도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북핵문제 해결이 일사천리로 될 것이라며 더디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북미 간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된다면 한반도 군비통제와 군비감축 협상은 남북 간 북미 간에도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정 전 장관은 "북미 간 수교가 진행된다면 동북아의 냉전구조 절반마저 해체되어 동북아질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며 "냉전구조가 해체되면 반쪽만 남은 냉전 관계에 기대서 명맥을 유지해왔던 분단체제, 대북 적대를 전제로한 분단체제가 토양도 자양분도 없어지기 때문에 와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지분에 대한 문제로 중국이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고있는 상황"이라며 "그동안 종전선언 주체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밀고당기기를 했는데, 최근에 시진핑 주석이 동방경제포럼에서 남·북·미가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에 중국이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처한 국내적 상황이 북미 간 관계를 진전시키는 요소라고 분석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모두 낭떠러지에 서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외교적 업적을 내고 싶어 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 때부터 인민들에게 약속해왔던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국 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핵이라도 포기해야 한다"며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수교를 해주고라도 비핵화를 완성해야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바로 이런 흐름이 냉전 관계 해체의 가속화를 가져온다"며 "국내적으로는 분단체제의 와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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