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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유신의 한복판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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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유신의 한복판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63>대통령 전용열차까지 타고 전국 누볐다

1976년 1월27일 내무부를 순시 중이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손재식 지방국장(훗날 5공 정부의 국토통일원장관)을 불러 세워 물었다. "10월 유신의 기본이념이 무엇인가?" 손 국장은 내무부의 엘리트 국장답게 평소 외워 두었던 답을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능률의 극대화로 안정과 번영을 이뤄 조국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지극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나자 정부 각 부처 공무원들은 이 답을 열심히들 외웠다.

1976년 1월이면 이른바 10월 유신을 감행(1972년 10월17일)한 지 3년 3개월여가 지난 시점인데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심한 '유신선포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말하자면, 유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누가 봐도, 대통령 박정희 씨 개인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군대의 힘으로 눌러 헌법기능을 정지시키고, 반대파의 정치활동을 봉쇄하는 등의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름 아닌 그 뻔한 이야기를 박정희 씨는 '장기집권 획책'아닌 다른 말로 포장해 합리화시켜 보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 했다.

그가 손재식 당시 지방국장의 답변에 만족감을 표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나 유신은 말대로, 능률부터 극대화 되지 않았다. 당장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대통령 하고자 하는 대로 입 다물어 주고 제동을 걸지 않아야 했으나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사람 아닌 대통령 박정희 씨가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뤄져야 할' 안정과 번영은 뒤 따르지 않았다. 조국 평화통일 기틀 마련과도 관계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 때문에 유신 훨씬 이전부터 걸핏하면 대학과 고등학교까지 문을 닫았고, 비상사태 선언이니, 긴급조치니,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니 해서 '처음에는 세게, 두 번째는 더 세게'로 이어지는 조치들이 꼬리를 물었다. 개괄적으로 보면 1961년 쿠데타 이후 박정희 씨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4년 임기(1차 임기는 1963년부터였다)에 들어서는 1967년, 3선 개헌을 노리면서부터 그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통치'는 시작되었다. 대통령을 오래오래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5·16쿠데타 이후 강행한 3번의 국민투표(3선 개헌·유신헌법·유신재신임) 모두가 그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다. 유신과 유신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는 국민들이 투표안건 내용에 대해 찬성과 반대토론을 할 수 없도록 하는가 하면, 개표 참관인의 자격을 제한하는 등, 요즘 세상 같으면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는 작태도 벌어졌다.

택시를 타고가거나, 대포 집에서 소주를 마시다가도 유신과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 말 한마디 삐끗 잘못하면 잡혀갔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했다고 징역 몇 년씩을 선고 받곤 했다. 유신과 장기집권 반대 투쟁을 벌였다 하여, 멀쩡한 젊은이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국가변란을 획책했다고 몰아붙여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박근혜 의원은 증거 없는 모함이라 했으나 당시 대통령 박정희 씨가 모를 리 없는 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 이야기다.

이미 숨진 그들은 최근에서야 정식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 되었고, 유족들이 수백억 원의 배상판결을 받기도 했다. 박정희 씨 통치시대에 빚어진 소설 같은 이야기들 이다.

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의원이 요즘 가장 막강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여론조사 마다 국민들의 지지율 1등이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후보경쟁자가 사실상 없다.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後光) 때문에 그렇다고들 말한다. 민주화와는 엄청나게 거꾸로 간 인생을 살다간 박정희 씨가 오히려 박근혜 의원의 후광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러니 가운데서도 아니러니다.

행적과 평가가 이렇게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박정희 씨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수출 밀어주기 정책으로 혜택을 본 대기업과 부유층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로 떠올라 여론의 주도층이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 씨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판은 대선국면이다. '박정희'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 '박근혜'를 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오해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박근혜 의원은 근래 아버지의 '18년 통치'와 관련해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본)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고 말해 왔다. 박근혜 의원이 지칭한 '산업화 과정'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근대화와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10월유신·줄 이은 긴급조치 그리고 인혁당 사건으로 대표되는 비민주적인 인명살상 행위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의 근대화를 뺀 나머지 부분까지 산업화라 말하는 건 무리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씨가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곧 이어 숫자로 설명하겠지만, "박정희 씨 아니면 근대화의 기초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 근대화가 박정희 씨의 잘못을 덮을 수도, 희석 시킬 수도 없다고 본다.

게다가 그가 이뤘다는 근대화(산업화)도 재벌들의 수출을 밀어 주면서, 근로자들과 농민들에게 저임금과 저곡가(低穀價) 같은 희생을 강요하면서 이뤄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씨의 분신자살도 바로 그런 참혹한 상황에서 비롯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근대화(산업화)라는 것의 성과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발효되던 1953년 이 나라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한국은행 자료)였다. 그 소득은 1960년 79달러, 5·16쿠데타가 일어나던 1961년 82달러이던 것이 박정희 씨가 피격되던 1979년 1693달러에 이른다. (1969년 이전은 1975년 기준의 액수, 1970년 이후는 2005년 기준의 액수) 이게 말하자면 박정희 씨의 산업화 성적표다. 18년 동안 1614달러가 늘었다.

그러나 참고로 전두환 씨는 8년간 1709달러가 불어나 3402달러(87년 말)에 이르렀고, 노태우 씨는 5년간 4312달러가 늘어난 7714달러(92년 말)가 되었다. 김영삼 씨는 IMF 초래 정부이므로 논외로 하고, YS의 IMF경제를 물려받은 김대중 씨는 5년간 595달러가 불어 1만 2100달러(2002년 말), 노무현 씨는 5년간 9532달러가 늘어난 2만 1632달러에 이르렀다.

박정희 씨의 18년 동안, 79달러에서 1693달러가 된 것을 놓고 무려 21.4배나 불어나 '산업화'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좀 가혹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나 강조해서 부각시켜야 할 만큼 좋은 성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초기단계라 소득을 늘리기가 더 쉬었던 점도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박근혜 의원의 사과 가운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본) 분들께'란 대목도 맞는 소리가 아니다. 그 말은 "아버지가 고의성 없이, 피해가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한 일"이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집권 18년 동안, 특히 집권 후반부에 고문 당하고 구속되고 죽기까지 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해자 측이 고통을 예상하지 않은 피해자는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요약하자면, '산업화 과정에서의 피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독재정치 과정에서의 피해'라고 고쳐 말하는 게 맞다. '피해를 입게(보게)' 한 것도 '본의 아니게'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되는, 그런 피해를 보도록 의도되기 까지 한 '본의(本意)'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독재정치 과정에서' '본의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라며 사과하는 게 옳다.

박정희 씨가 72년 10월 유신을 감행하면서 그 사실을 두 차례나 북한에 사전 통보해 줬다는 보도가 있었다. 10월 유신 2개월 후인 72년 12월 북한도 헌법을 고쳐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이 국가주석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남과 북에서 유신체제와 주석체제가 들어섰다. 박정희 씨는 영구집권을 위해서 김일성과도 손발을 맞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정희 씨는 이 무렵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총화(國民總和)'를 말했다. 말 그대로 '총화'는 전체의 화합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박정희 씨가 말한 총화는 내용이 좀 다르다. 판 전체의 화합을 위해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며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다. "대통령이 장기집권 하고자 해도 입 다물고 제동 걸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간 뒤 박근혜 의원은 새마음봉사단 총재 등 유신체제를 위해 맹렬히 활약했다. ⓒ새마음의 길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간 뒤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 당시 영애도 그 국민총화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다녔다. 총화와 충효(忠孝)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고 거듭 개탄했다. '화합을 깨뜨리는' 데모하지 말고, 대통령의 유신과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 내지 말라는 호소였다. 그녀는 그때 새마음봉사단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이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였겠으나, 대통령 전용열차까지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전국을 맹렬히 누비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아버지의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의 한 복판에서 그녀는 그렇게 젊음을 불태웠다.

박근혜 의원은 아버지의 일을 사과하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준)건 아버지이고 나는 좀 떨어진 곁에 있었을 뿐이지만, 아버지 대신 사과한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를 아울러서 '사과문' 내용을 바꿔야 한다. "유신 이념에 따라 장기집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분들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혼자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저도 유신의 한 복판에서 맹렬하게 뛰었습니다. 분명히 밝히면서 사과드립니다." 진심을 얹어 그렇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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