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 신기옥, 최시중이 배후"라는데…검찰은 흔한 '서면 조사'도 안해
2007년 대선 당시 김경준 씨의 수감 동료 신경화 씨가 김 씨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던 문제의 편지에는 "큰집"(노무현 정부 청와대)이 김 씨의 입국에 간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결국 문제의 편지는 당시 여권이 이명박 대통령을 흠집내기 위해 김경준 씨를 '기획 입국'시켰다는 이명박 대통령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이 대통령이 'BBK 정국'을 반전시킨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 문제의 편지가 4년 반만에 조작된 것으로 드났다. 신경화 씨의 동생 신명 씨가 "내가 편지를 작성했다"고 폭로했고, 김경준 씨 등 관련자들이 고소 고발을 하면서 사건의 진상 일부가 새로 드러난 것이다. 검찰은 신 씨가 주장한 내용 중 '신명 씨→양 모 경희대 행정실장→김병진 이명박 후보 상임특보(현 두원공대총장)→은진수 BBK 법률팀장→홍준표 전 새누리당 의원'으로 이어지는 편지 전달 루트를 확인했다.
그러나 검찰이 확인한 것은 여기까지다. 신 씨는 "이상득, 최시중, 신기옥 등 현 정권 실세들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이들 핵심 인물들에 대한 조사에는 착수하지도 않았다. 검찰은 신경화 씨가 감옥에서 나오고 싶어했다는 점, 양 실장이 가짜 편지라는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동생 신명 씨가 편지를 '대필'을 했을 뿐이라고 보고 있다.
편지를 직접 작성한 신명 씨가 "조작된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검찰은 핵심 인물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은채 편지 내용이 '진짜일 가능성'만 보고 있는 황당한 상황인 것이다.
급기야 신명 씨는 지난 17일 복수의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은진수 전 위원이 만든 편지가 윗선 누군가에게 전달됐고, 이 대통령 손위 동서 신기옥 씨, 김병진 전 이 대통령 후보 상임특보, '양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양승덕씨를 거쳐 나에게 왔다"며 "2007년 11월9일 양씨가 타자로 친 원본 편지를 건네면서 내게 자필로 쓰고 형인 신경화 씨의 서명을 넣으라고 지시했다"고 편지 자체가 가짜임을 거듭 주장했다.
신 씨는 이상득, 최시중 등 정권 실세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손윗 동서인 신기옥 씨가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 씨는 이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로 "양 실장은 대선 후 최시중 전 위원장과 이상득 전 의원이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내게 귀띔했다"고 말했다. 가짜 편지 작성이 끝난 후 양 실장이 "'줄 잘섰다'고 표현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준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
역시 'BBK 마무리 소방수' 한상대 검찰총장
검찰이 BBK 가짜 편지 수사에 착수했을 때부터 이같은 상황이 예견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와중에 한상대 검찰총장의 특이한 이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한 총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서울고검장을 지내다가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한 직급 내려간 '이례적인 인사'의 주인공이었다.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으로 가는 '하이웨이'였기 때문에 당시 인사는 주목을 받았다.
한 총장이 5개월짜리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내며 맡은 대형 사건은 사실상 두 건이었다. 한 총장이 부임한 후 BBK 투자금의 출처로 의심받고 있는 도곡동 땅 매각 사건의 '키맨'인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2년 여 만에 뜬금없이 귀국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은 세간의 의혹을 일축하고 '한상률 사건'을 개인 비리로 한정해 신속하게 기소했다.
비슷한 시기 김경준 씨의 누나 에리카 김 씨가 미군 산하 오산미군비행장을 통해 귀국해 역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옵셔널벤처스(옛 BBK투자자문) 자금 319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에리카 김에 대해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이명박-에리카 김의 빅딜' 설이 나왔다. 에리카 김 씨가 BBK 의혹의 잔재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대신 검찰이 그의 비위를 눈감아 줬다는 내용의 의혹이었다.
두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한 후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인 한 총장은 중앙지검 부임 5개월 만에 검찰총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한 총장의 장인이 이상득 의원의 육사 동기로 '절친'이라는 점 역시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임기말 불거진 'BBK 의혹' 후폭풍은 모두 한 총장에 의해 잠재워진 꼴이다. 'BBK 가짜 편지' 사건마저 서둘러 마무리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한 총장은 BBK 전문가", "BBK 의혹의 마무리 투수"라는 정치권의 비판이 과한게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한 총장 부임 이후 검찰은 착수한 이명박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 역시, 대선을 불과 6개월 남긴 현재 단 한 건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최시중, 박영준 등 정권 실세들은 단순 개인 비리로 구속됐고,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의 경우 검찰은 정치권이 특검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실 수사'로 일관했다. 내곡동 사저 수사는 '무혐의' 결론을 내려 아예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7월에는 검찰 고위 간부 인사가 있다. 이 대통령의 측근인 권재진 법무부장관과 한상대 총장이 인사권을 쥐고 버티고 있는 한, 일선 수사 검사들이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지원 "BBK 가짜 편지 배후 없다? 깡통 수사 결과"
민주통합당은 BBK 가짜 편지 사건 수사를 "깡통 수사"라고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이) 내곡동 사저,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를 엉터리 결과로 발표했다. 이제 BBK 가짜 편지 사건도 깡통 수사 결과를 발표하려고 하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며 'BBK 사주한 정치권 배후 없다'는 결론으로 몰고 나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내곡동 사저 의혹,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BBK 가짜 편지 의혹을 이명박 대통령 3대 비리로 규정짓고 특검, 국정조사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해찬 대표는 여기에 "검찰 개혁"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어, 향후 정치권과 검찰간 신경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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