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룰>의 저자인 앤드루 바세비치(Andrew J Bacevich)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보통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책상물림 강단좌파가 많은 편이다. 바세비치는 이들과 다르게 미국 군인의 엘리트코스인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오랫동안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1970년대 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독일에서 근무했다. 가톨릭 보수파로서 철두철미 미국주의자였던 그는 부시의 이라크침공을 계기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선다. 가톨릭 보수파이자 군 장교 출신이라는 경력은 그의 책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준다. 유명세로만 따진다면, 1차 걸프전 참전 군인에서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켄 오키프(Ken O'Keefe)도 만만치 않지만 바세비치 같은 고위급 장교 출신은 아니다.
바세비치는 이 책을 무슨 의도로 쓴 것일까?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워싱턴 룰>을 쓴 가장 큰 목적은 미국 국민에게 미국 국가안보 정책의 진정한 핵심을 규정하는 행동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개입주의, 이를 작동시키기 위한 세계적 힘의 투사, 그리고 이를 위한 미 군사력의 세계적 배치라는 이 행동방식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생겨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미국적 신조와 성 삼위일체(Holy Trinity), 이 두 가지를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이라고 부른다. 미국적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 즉 성 삼위일체가 필요하고 성 삼위일체의 막대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신조가 필요하다. 이 두 요소는 맞물리면서 서로를 강화한다. '워싱턴 룰'의 또 다른 의미는 정보부서와 국방부서가 전쟁위기를 선동하면 정부는 무기생산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방산업체에 퍼붓는 것을 말한다.
'워싱턴 룰'의 워싱턴은 지리적 워싱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워싱턴 룰'의 워싱턴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는 조직과 인물에 대한 총칭이다. 바세비치는 워싱턴의 범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정보파트와 국방부는 당연히 포함된다. "워싱턴의 범위는 거대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TV방송국과 뉴욕타임스 같은 고급신문들, 나아가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나 하버드 대학 케네디행정대학원 같은 준학술조직을 포괄한다."
워싱턴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광범위해서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주류언론이 전쟁시스템의 일부라니?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뉴욕타임스는 노암 촘스키까지도 진보성을 인정한 신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국제면으로 흡수한 언론인데 워싱턴의 일부라니? 아니 cnn은 이라크전쟁 전 후세인을 인터뷰해서 보수파로부터 적과 내통한다는 비판까지 받은 미디어인데 워싱턴일 수가 있을까? 바세비치는 미국의 주류언론과 학술기관조차도 전쟁에 복무하는 기관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쟁 친화적 시스템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미국이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하는 데에는 앨런 덜레스(Allen Dulles)의 중앙정보국 CIA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의 전략공군사령부 SAC의 역할이 지대했다.
덜레스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CIA 국장으로 근무했다. 그의 지휘하에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를 전복시키고 샤를 국왕에 옹립한다. 또한 과테말라의 좌파출신 대통령 야코보 아르벤즈 구스만을 군부 쿠데타를 조종해 축출한다. 이때부터 덜레스는 전 세계에 있는 미국 대사관 안에 CIA 조직을 심어두었다. 미국 정부가 나서기 곤란한 일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행하는 조직이 CIA였다. 제3세계에서 발생한 수많은 쿠데타의 배후에는 CIA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르메이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전략공군사령부를 지휘했다. 2차대전에서 공군사령관을 역임한 르메이는 도쿄 대공습과 원폭 공격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략공군사령부를 맡았지만 변변한 수준의 무기도 없었던 기관을 1950년대 초반에 55개 기지와 2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곳으로 변모시켰다. 르메이의 목표는 소련의 확증파괴였다. 1957년 공격 목표는 무려 3200개나 되었다. 목표 대상을 극대화시킨 후 무제한적인 예산을 배정받았다.
엄청난 국가 예산은 소련으로부터의 방위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들의 전쟁위기 선동에 정부는 끌려다녔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수립계획조차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니라 전략공군사령부의 권한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인지 가능한 모든 공격 목표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과 그 전력의 세배에 해당되는 예비군사력까지 확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아이젠하워 정권의 말기가 되면, '워싱턴 룰'은 미국 정부 내외부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린다. 중앙정보국과 전략공군사령부가 확립한 관행들이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되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그 유명한 고별 연설을 하며 물러난다. 아이젠하워는 군산복합체의 부상을 경고했지만, 막상 그의 재임 시 군산복합체의 군수경제의 덕을 보았다. 군수경제로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다. 소련의 위협을 선동하고 지금보다 더 많고,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는 군산복합체의 선동에 미국 정부는 그대로 따랐다. 전투기, 탱크를 생산하는 방산업체들이 번성하고 노동자는 이들 기업에서 일하게 된다. 실업률은 낮았고 인플레이션도 안정적으로 관리되었다. 아이젠하워 재임 시 국방예산은 미국 정부 지출의 50%를 넘었다. 비록 고별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재임 시의 호황은 군산복합체 덕분이기도 했다.
군산복합체에 휘둘렸던, 그러나 나중에는 후회한 아이젠하워가 물러났으니 좀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 패기만만했던 후임 케네디는 달랐을까? 젊은 나이라는 대중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케네디는 취임 이후 덜레스를 유임시키고 르메이는 참모차장에서 참모총장으로 진급시켰다. 또한 케네디 정부에서는 트루먼,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중앙정보국과 전략공군사령부에 밀리기만 하던 육군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선 두 정부에서는 육군의 역할이 미미했다. 이런 사실은 예산상으로도 확인된다. 1958년 방위예산 중 육군의 몫은 23%에 불과했다. 육군에게는 핵전쟁에 대비한 인계철선의 역할만 주어져 있었다. 드디어 육군은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라는 신개념 전략을 들고 나왔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맥스웰 테일러(Maxwell Taylor)는 예편 후, <불확실한 트럼펫(The Uncertain Trumpet)>(국내 미출판)이란 책을 출판한다. 그는 이 책에서 핵무기에 의존해 전쟁을 피하려는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지적한다. 그는 아이젠하워 시기 확립된 핵무기에 의한 대량 보복전략은 전면적 핵전쟁이나 타협 두 가지 대안만을 제공하기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능한 모든 범위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즉, 지상전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을 통해 육군은 다시 자신의 지분을 챙길 수 있었다. 군산복합체에 끌려다니던 케네디는 아이젠하워가 제한한 방위비 지출의 상한선을 풀었고, 소련과의 '미사일 갭'이라는 가공의 프레임을 맹종해 지상 발사 대륙간탄도탄의 생산에 매달렸다. 국가방위에 대한 케네디의 강박은 이후 쿠바 침공으로 나타난다.
책의 후반은 전반에 기술된 내용의 연속이다. 국내에서는 진보적 정책을 폈던 린든 존슨이지만 무리하게 베트남전쟁을 확대한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이 대대적인 반전운동을 불러오면서 '워싱턴 룰'도 일시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격을 통해 금방 권력으로 돌아온다. 이들에 의해 베트남전쟁은 전쟁을 선호하는 미국의 체질 탓이 아니라 단순한 실수로 정리된다. 클린턴 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울브라이트는 '미국의 신조'의 완벽한 부활을 의미했다. 미국이 주도한 제재의 결과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변한다. "어려운 선택이었죠. 그러나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런 정도의 희생을 치를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50만 명의 목숨 값과 맞먹는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대다수 분석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제재와 침공은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석유는 어린이들의 목숨 값이었던 것이다. '워싱턴 룰'은 뒤에 오는 부시 정부에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다.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에 대해 이렇게 나열한다. "가족 일원의 전사로 인한 상실감, 전투에서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참전용사들의 고통, 비밀과 은폐와 뻔뻔한 거짓 속에 운영되는 거대한 관료기구의 존속, 군산복합체가 희소한 국가자원을 몽땅 빨아들이면서 일어나는 국가적 우선과제의 왜곡, 전쟁과 전쟁준비의 부산물로 일어나는 환경파괴, 극소수 병사들이 영구전쟁의 부담을 지는 한편 대다수 시민들은 이들을 존경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들의 희생을 무시하거나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데 따른 뼈대만 남은 시민문화 등등." 도대체 이런 희생을 하면서 왜 전쟁을 치르려는 것일까? 바세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워싱턴이 이 신조와 성 삼위일체에 집착하는 것은 이것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관성으로 포장된 편협한 자기 이익 때문이다." 즉, 누군가에게는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바세비치가 말하는 누군가의 목록은 이렇다. "선출직 또는 임명직 관리들, 기업간부와 기업을 위한 로비스트들, 군 장교들, 여러 국가안보기구의 요원들, 언론인들, 대학과 연구기관의 정책전문가들이 그들이다. 매년 펜타곤은 미국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의 돈을 쓴다. 이 돈이 미국 정치의 윤활유가 된다. 각 당의 정치자금을 채워주고 유권자들에게 일자리와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퇴역 미군장교들이 무기회사나 자문회사에 고용돼 크게 이윤이 남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줄이 된다."
토크빌이 격찬하던 민주주의 국가가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되었는지 답답하다. 그런데 더욱 답답해지는 것은 미국의 이런 '워싱턴 룰'에 제대로 맞선 정치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거의 없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bright)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들끓던 당시에 베트남전쟁 참전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는 끊임없이 외국에 개입해야 한다는 미국의 믿음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숙고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은 미국의 의무도 아니며 권리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그는 미국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몇몇 사람들이 워싱턴 룰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풀브라이트처럼 비중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리비아, 시리아에 개입해 중동을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책은 깊은 내공으로 써내려간 전쟁국가에 대한 보고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아무리 기득권세력들이 '워싱턴 룰'로 똘똘 뭉쳐 있다고 해도 어째서 불합리한 신조를 맹종하는 세력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쓴 전비만 최저 3조 달러에서 최대 7조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노숙자는 한국인이 상상도 하지 못할 수준이다. 다음은 2011년 12월 21일 자 <엘에이(LA) 중앙일보>
"미국에서 보호 시설, 차량, 버려진 건물, 공원 등에 사는 노숙 어린이가 지난해 160만 명에 달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립노숙가정센터가 19일 발표한 '어린이 노숙 문제 해결을 위한 대국민 행동 촉구'에 따르면 2007년 이래 계속된 경기불황으로 청소년 노숙 인구는 28% 급증해 작년 어린이 45명 중 1명에 달했다. 이 같은 추세는 미국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몇몇 주의 상황은 훨씬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숙 어린이 절반이 6개 주에 살고 있으며 특히 미국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주인 조지아 앨라배마 캘리포니아에 몰려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집 없는 어린이의 42%는 6세 미만이며 3분의 1은 만성질환이 있는 홀어머니와 살고 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어린이 160만 명을 노숙으로 몰아놓고도 전쟁을 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바세비치는 미국 대중들에게 만연한 '시민정신의 부재'를 한 가지 원인으로 말한다. 그는 "미국인들은 집단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선택을, 장기적 웰빙보다는 즉각적인 욕망의 충족을 더 중요시한다"고 말한다. 1973년부터 실시된 모병제는 일반 시민과 워싱턴 양자를 모두 만족시킨다. 시민들은 자율이라 믿고 워싱턴은 제국적 야망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징병제가 아니기에 베트남전쟁 같은 징병거부는 발생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군복무에서 벗어났고 이를 '자유'라고 착각한다.
바세비치의 장점은 미국의 전쟁을 몇몇 부도덕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라크전쟁이 발생하자 많은 지식인들이 부시와 네오콘을 비판했다. 그들은 부시와 네오콘의 무리수와 일탈이라는 관점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 바세비치는 이라크 침공 같은 미국의 정책을 미국에 내재한 논리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한다. 부시 한 사람, 네오콘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좋은 국가 미국을 특정한 세력이 납치했다는 것이다. 군수산업체, 첩보계, 학술기관, 언론이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미국을 영구 전쟁국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세비치의 정당한 논변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허전하다.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도대체 왜 발생한 것일까? 수정주의 이론에서처럼 후진국이 시장과 자원공급처로 중요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다른 요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이클 헌트(Michael Hunt)는 미국 대외정책에 있어서 문화의 문제를 제기한 학자였다. 역사연구자 김정배의 논문 '미국의 제3세계정책'의 일부분을 인용해본다. "헌트에 의하면 인종주의, 반혁명, 자유제국 건설이라는 미국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역사와 함께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그것이 미국인의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을 지탱해주는 세계관이며 미국이 세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정당화했다." 즉, 헌트는 미국에 내재하는 심리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제3세계의 급진주의를 분쇄하는 핵심적 요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헌트가 말하는 심리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해도 이 신념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행동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결국 바세비치가 말하는 군산복합체 즉 워싱턴이 아닌가? 헌트의 설명은 행동적 층위에서의 설명이기는 해도 좀 더 심층적 근원적 층위에서의 설명이 되진 못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제국주의를 전쟁을 좋아하는 전(前) 자본주의적 사회계급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살아남아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슘페터의 견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슘페터는 "사회가 순수한 자본주의가 되면 제국주의적 충동을 일으킬만한 토양은 사라진다"고 까지 말했다. 위대한 경제학자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김공회 경상대 교수는 논문 '데이비드 하비의 제국주의론 비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론적 분석을 결여한 채 노골적인 침략행위 자체만을 두고 '제국주의적'이라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옹호 이데올로기, 또는 자본주의 순치 가능성을 인정하는 카우츠키식의 개량주의와 논리적으로 쉽게 맞닿을 수 있다."
김공회 교수의 지적은 미국의 '행태'에만 초점을 맞추면, 폭력적 미국이란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쁜 행태는 좋은 정부와 좋은 시민에 의해 교정될 가능성이 남겨져 있다. 김공회 교수의 관점을 따른다면 바세비치도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김 교수의 논리를 따르면 '폭력'은 미국의 일탈적 요소가 아니라 미국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의 논문을 몇 편 들여다보아도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찾기 힘들었다. 김 교수에게는 너무 자명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 룰'만으로는 왜 미국이 워싱턴에 포획되어 움직이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백>(이원태 옮김, 삼인 펴냄), 윌리엄 엥달의 <전방위지배>(유지훈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와 촘스키의 저서, '글로벌리서치'의 칼럼에서도 미국이 왜 나쁜 행동을 반복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자본주의 내적 논리 자체가 제국주의를 초래한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상황을 과도하게 일반화하기에 충분한 답변이 되기는 어렵다.
워싱턴을 설명하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 힐퍼딩, 홉슨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 합당한지는 의문이다. 자본주의가 만성적 과잉생산을 해결하기 위해 비자본주의 지역으로 확장해 출구를 찾는다는 로자, 군사주의와 결합해 국경을 넘어가는 금융자본을 설하는 힐퍼딩, 과잉생산, 과잉자본을 없애기 위해 국내의 공공소비, 민간소비를 증진시키자는 홉슨 등의 주장을 21세기 미국의 행태와 연결시키기는 무리인 듯하다.
영국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영구 군비경제론을 주장했다. 군비증강이 경제 전반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지연시킨다는 이론이다. 1920년대 말 소련에서 전시경제체제가 등장하자 뒤이어 일본, 이태리, 독일, 영국도 뒤따라간다. 미국도 2차 대전이 발생하자, 곧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한다. 전시경제체제는 경기부양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과학 연구자 최일붕의 글 '국제 사회주의경향의 기원'에 나온 내용을 인용해 본다. "이 군비 증강 드라이브가 경제 부양 효과를 낸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1944년 1월 GE(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찰스 윌슨은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상시전쟁경제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도되지 않은 역사적 결과'였던 것이다."
중국 국방대학교 교수이자 군사전략가 차오량의 설명이다. 차오량은 미국이 영구 전시체제를 유지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차오량은 전쟁의 동기는 '달러 지키기'라고 말한다.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무너진 후, 미국은 가상에 근거한 금융산업으로 지탱하게 되었다. 금융산업을 지탱해주는 것은 달러이며 달러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제1의 목표가 되었다. 1971년 달러의 금 태환 포기는 달러의 가치를 위태롭게 했지만, 1973년 모든 석유 거래를 달러로 결제케 함으로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를 지켰다. 석유와 연결된 '페트로 달러'의 출발이었다.
차오량은 1971년 이후 '10년의 달러 약세, 6년의 달러 강세'라는 달러 가치의 순환을 통해 세계의 부를 미국이 빨아들인다고 말한다. 차오량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달러 강세를 시작하기 직전 지역위기를 의도적으로 고조시킨다. 그래야 해외를 떠돌던 달러들이 미국으로 재유입된다. 밀로세비치에 대한 소문의 대부분이 거짓으로 판명 난 유고전쟁은 당시 막 시작하려던 유로화에 큰 타격을 입혔다. 달러의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화폐였기 때문이다. 산유국가의 전쟁은 석유가격을 올리고 거래결제를 위해 달러 수요를 증가시킨다. 후세인은 석유거래에 유로화를 사용하려 했다. 이것이 이라크 침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미국이 세운 이라크 임시정부의 첫 번째 포고령은 이라크의 모든 석유대금 결제는 유로화가 아닌 달러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달러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언제나 전쟁 중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았다. 토니 클리프의 '영구 군비경제론'과 차오량의 '달러 패권론', 두 이론은 영구전쟁국가 미국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만약 '두 이론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바세비치의 '워싱턴 룰'의 "워싱턴세력이 미국을 납치해 전쟁중독으로 만들었다"는 전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위대한 미국을 위싱턴세력이 납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가장 효율적 생존전략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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