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지역 최초의 의병 창의는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 있는 석동(현 석골사)으로 학계와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단편적인 문헌에 의한 유추적인 해석에 의존해 왔다.
이 자료는 이경홍(1544~1595)의 15대 종손 이용정 씨(75)가 선조의 명예회복을 위해 10여 년 동안 백방으로 노력해 찾은 낙재 서사 원의 문집인 낙재집과 낙재 선생일기로 의병 창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다.
임진왜란 발발 426년이 지난 지금까지 밀양석동(석골사)에서 일어난 의병 창의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에 간행된 밀주지를 근거로 인용해 왔으나 의병 창의의 주체자를 규명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어 향토사 연구자들이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초유사인 학봉 김성일에 의해 소모 관으로 발탁된 낙재 서사 원의 문집인 낙재집과 낙재선생 일기에 수록되어 있어 낙재선생문집이 밀양지역 창의 역사의 실체를 밝혀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을 전망이다.
이 낙재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공산의 진군을 조직할 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서사 원(1550~1615)의 시문집으로 낙재가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인 1616년에 제자들에 의해 편찬되어 1843년 후손 서우열에 의해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증간된 낙재집에는 서사원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상황과 체험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사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재집과 관암전서 준원전 편을 근거로 밀양의 창의 시기를 유추해 보면 1592년 4월 18일 밀양작원관 전투에서 패전한 밀양부사 박진이 밀양읍성으로 돌아와 무기고와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후 울산방면으로 물러난 이후이다.
관암전서 준원전 편에는 “선묘 임진 4월 왜 가 서울에 들어왔는데 5월 4일 저녁에 급보가 이르렀다. 본전 참봉 이경홍은 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본부 부사 이원성이 단오절 행사 헌관으로 왔는데 모두 창황히 흩어졌다”고 하여 이경홍이 5월 4일 변란의 소식을 듣자 노모가 걱정되어 함경도 영흥을 출발 밀양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고 석 동에서 머무는 시기이다.
근재 이경홍은 조선 명종 때의 학자로 좌부승지를 지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의 장자이며 임진왜란 당시 대구 팔공산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창원 부사를 지낸 오한 손기양선생의 스승이다.
지금까지 임진왜란 당시 밀양 석동에서 일어난 창의 사실을 알 수 있는 문건이 발견된 적이 없고 다만 1825년에 발간된 오한 집과 죽 포집 등 개인 문집에 단편적인 기록과 손기양 이경승이 창의했다는 기록은 밀주지, 밀양 읍지, 밀양 징신록 등의 기록에 의존했다.
자료 발굴자 부산 성산 인문학 연구소 박희찬 씨(72)는 “근재공의 교우 관계가 있는 분들의 문집 일기 등을 조사하여 근재공의 사실 기록을 확인해 나갈 예정이다”고 밝혔다.
한편, 밀양 향토사와 학계에서는 이번에 발견한 의병 창의 통문 기록으로 밀양의 석동에서 일어난 창의 역사의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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