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선 피고인, 무죄입니다. 무죄."
오른손에 지팡이를 든 오재선(78) 할아버지가 재판부를 주시했다. 청력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왼쪽 귀에 손을 대고 재판장이 말하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쏟았다.
경찰의 고문으로 오른쪽 청력을 잃은지 33년. 모진 고문 속에 간첩으로 내몰려 실형을 선고 받은지 32년 만에 오씨는 법정에서 억울함을 풀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제갈창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32년 전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오씨의 재심 재판에서 23일 무죄를 선고했다.
오씨는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전에 부모와 제주로 향했다. 1948년 4.3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16살이던 1956년 오씨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당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지만 학비가 없어 스스로 교문 밖을 나섰다.
먹고 살기 위해 가방공장 재단사와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일본 여성을 만나 새로운 가정까지 꾸리고 1970년대에는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며 자리를 잡았다.
오씨는 느닷없이 일본 야쿠자의 마약 밀매 사건에 얽혀 1983년 3월 제주로 강제소환됐다. 목장 일을 하며 생업을 이어가던 1985년 4월 제주경찰서 대공과 수사관이 집에 들이닥쳤다.
한 달 넘는 불법감금으로 고문을 당했다. 경찰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곧이어 반국가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지령을 받은 인물로 조작됐다.
북한을 찬양하고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정보를 수집했다는 공소장이 꾸며졌다. 고문 속에 허위 자백으로 이어졌고 1986년 6월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당시 오씨가 뒤집어쓴 혐의는 제주지역 비료가격 인상 기밀 수집, 깡패를 동원해 만든 5.16도로 기밀 수집, 애월읍 시외버스정류소에서 판매한 전국 교통시간표 기밀 수집 등이었다.
오씨는 5년2개월을 복역하고 특사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에 시달렸다. 2005년 스스로 요양원으로 향했다. 요양원에서 생을 다하기 전에 억울함을 풀자 다짐했고 믿음은 현실이 됐다.
재판부는 재심 선고공판에서 "오씨가 조총련 사람들과 만난 적은 있지만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국가에 해악을 끼쳤다는 점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무죄 선고 직후 오씨는 <제주의소리> 기자와 만나 32년의 한을 풀어냈다.
오씨는 "배우지 못했지만 죽기 전에 억울함을 풀고 싶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며 "재판을 위해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과거 자신에게 실형을 선고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향해서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하지만 난 간첩이 아니"라며 "자기반성을 먼저 하고 새로 태어나라"고 충고했다.
오씨는 "동생과 가족들을 보며 모진 생활을 견뎠고 이제 한도 풀었다"며 "과거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다시 양로원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했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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