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의 '지시'가 어명(御命)처럼 행세하던 때였다. 군말 없이 영상을 만들어 가던 선배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있다. 보도국도 촬영실도 다 말을 못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선배들조차 그러던 때인데다, 선배들 담배 심부름까지 해야 했던 시절이라 필자는 무어라 말을 할 계제가 못 되었다. 그해 5월에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그랬다. 여당 유세는 사람이 많고 야당은 청중이 듬성듬성 해야 했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영상조작'이 이번 제19대 총선에서도 등장해 맹위를 떨쳤다. MBC노조는 편파화면의 빈도와 행태까지 밝히며 보고서를 내 놓았으나, 꼭 그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 있게 TV뉴스를 본 사람은, MBC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방송들이 어떤 식으로 영상을 손질해 내보냈는지 대개는 짐작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항상 거리의 많은 인파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웃었다. 한명숙 민주당 대표는 겨우 두세명이 함께 걸어가거나 회의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나왔다. 차별화 되었다. 박근혜 위원장 옆에는 항상 자기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메고 지역후보가 함께 했으나, 한명숙 대표는 지역후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까지 있어 "누구를 지원하고 있는지"하는 생각이 들게도 했다. 대체적으로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화면이었다.
특히 앵글의 편파성은 심했다. 예를 들자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광장 옆 건물의 1층이나 2층쯤에서 찍은 화면과, 빌딩 옥상에 올라가 전체광경을 촬영한 화면은 느낌에서 보통 차이가 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비교되는, 서로 상반되는 형태의 영상을 얼굴에 철판도 깔지 않고 태연히 내 보냈다. 방송들이 그랬다.
때 마침 파업 중이라 조금도 기자들 눈치 볼 필요 없이, 거리낌 없이 그런 짓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영상 뿐 만이 아니었다. 기사 내용도 그랬다. MBC노조는 "선거기간 중 총선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편파 뉴스가 나갔다"고 목청을 높혔다. 그러나 영상 조작은 앞서 말한 1971년 대통령 선거가 효시 아니었나 싶다. 말하자면 이번 총선의 TV뉴스는 정확히 41년 전으로 시계바늘이 되돌려진 상태에서 전파를 탔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두환 군부통치시대에도 여론조작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지 때 저질러진 '불공정'이 딸의 시대에 또 등장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적 비극이다. 한 해설가는 이번 총선에서 승패가 갈린 요인을 놓고 "새누리당에는 박근혜가 있었고, 민주당에는 박근혜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됐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이 특별한 리더십으로 어려운 형편의 한나라당을 구원하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선거의 전 과정을 통해 언론이 보여준 총체적인 편파보도를 감안한다면, "새누리당에는 박근혜가 있는 것처럼 (언론에 의해) 비쳐졌고, 민주당에는 박근혜가 없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에 그리 됐다"는 게 바른 표현이 될듯하다. 한명숙 대표의 리더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치더라도 그렇다.
▲ 방송 3사와 연합뉴스의 파업 기간 동안 치러진 총선의 선거보도는 공정성을 의심케 했다. ⓒ뉴시스 |
이번 총선에서 2000표 차이 이내로 승패가 갈린 지역구가 19곳이었다. 이중 11개 지역구를 막판에 새누리당이 가져갔다. 그 '막말' 때문에 초박빙지역의 야권 단일 후보들에게 1~3% 포인트씩의 마이너스 효과가 나타났고, 그게 바로 야당 우세였다가 여당 차지로 넘어간 초박빙 지역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요컨대 막말 파문 때문에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의석수가 대충 11~15석이라는 이야기다. 그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야권연대는 151~155석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막말 파문에다 불을 지피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했던 언론들의 역할이 새삼 주목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용민 후보의 막말은 용서받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김 후보는 사퇴해야 마땅했다.
방송사들은 4일부터 연일 주요뉴스가 그 이야기였다. 상황 진전도 없는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뉴스 앞머리에 지겹도록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4일부터 사설을 포함해 모두 41건의 기사와 칼럼을 쏟아 내 놓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방송과 신문들이 거의 다 그랬다. 그러나 언론의 그런 보도행태는 도가 지나쳤다. 너무 나갔다. 균형 감각이나 공정성도 무시되었다.
발행부수는 적어도 진보 성향의 신문들은 '김용민 사퇴'를 요구하는 사설을 실어 균형을 잡기도 했으나, 방송과 조중동 등 신문들은 달랐다. 별도로 도덕성 문제가 불거진 새누리당 후보들 모두에게는 전혀 다른 잣대를 갖다 대면서 편파보도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막말파문'이라는 이름의 '여론조작'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는 소리는 그래서 나온다.
암에 걸려 숨진 친동생의 부인을 성폭행 하려 했다는 새누리당 후보가 있다. 피해자인 '제수씨'가 증언을 하고, 그녀의 아들인 조카가 후보인 큰아버지와의 대화를 녹음했다는 녹취록까지 들고 나왔다. 당선자가 된 본인은 펄쩍뛰고 있으나, 피해자가 다른 사안도 아닌 '제수씨 성폭행 미수' 문제를 거짓으로 들고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사람의 태권도 관련 논문을 거의 '복사'하다시피 했다(표절 수준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게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교수까지 되었다고 했다. 그 부정한 소행을 감춘 채 IOC선수위원에 당선 돼 세계적 명사 행세를 하고 있는 후보도 있다. 이들 사안은 '막말'을 훨씬 뛰어넘는 '부도덕' 사례였다. 그러나 언론이 이들에게 들이댄 기준은 '막말'의 경우와는 너무도 달랐다. 부도덕에 대한 질타대신 '후보 간 비난사례' 정도로만 보도하기도 했다. 그나마 입 다문 언론도 있었다.
일본이 우리 땅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삼아,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독도를 "현실적인 분쟁지역으로 봐야한다"는 일본논리를 대변한 어처구니없는 후보도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독도가 우리 영토도, 일본영토도 아니라는 기가 차는 이야기가 된다. "오래전 쓴 글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고 그는 발뺌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가 서울대 동문 카페에 이 같은 글을 올린 것은 7~8년전 이었다. 김용민 후보가 인터넷 성인 방송에서 막말을 한 것도 7~8년전 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독도 망언'을 한 새누리당 후보에 대해서도 언론은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언론의 편파보도를 통한 여론조작이 선거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민주당으로서는 여소야대의 기회를 놓쳤다고 억울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귀 기울여야 한다. 작년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때도 언론의 편파보도는 다름없이 극심했다. 그런데도 박원순씨는 당선됐다. 여론조작으로 '공제'되고도 남을 만큼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편파보도 공제 말고도 민주당은 그동안 공제된 게 적지 않았다. 우선 공천과정에서 오만에 들떠 계파별 나눠먹기나 하다 공제된 게 많았다. 막말파문에서 결단 못 내리고, 곁눈질로 '나꼼수의 오만' 눈치 보며 공제 당한 것도 만만치 않았다. 기생(寄生)을 전문으로 하는 486들이 깎아먹는 공제에도 대비해야 했다.
민주통합당의 출범 때부터 줄곧 주목받던 '친노세력의 자기성찰 부족현상'은 선거가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공제' 차원이 아니라 궁핍한 재산에 살림살이 거덜 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소곳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이 이야기의 결론은 '언론의 여론조작' 쪽으로 가야한다. 이 나라의 내일을 생각할 때 언론 편파보도가 그만큼 심각한 지경에 와있다. 선거에서도 언론은 편을 갈라놓고 사실보도를 외면한 채 자기편 후보의 잘못 덮으면서, 다른 후보의 허물만을 사생결단의 자세로 부각시켰다. 그게 이번 선거다. 그런 여론 조작으로 선거결과를 뒤집어 놓는 건 언론이 저지르는 부정선거다. 앞으로 대선도 있다.
지금은 언론이 얼마나 나쁜 짓 할 수 있는지를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다. 헌법조항대로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할 이 나라의 권력이, 특정방송과 신문의 편파보도와 여론조작을 통해 나오는 이 기막힌 상황을 모두 나서서 결사적으로 막아내야 할 때다. 언론이 바로 서지 않으면 결코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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