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래 본격화된 맑스주의 쇠퇴와 자유주의 확대라는 정치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사회정치 실천이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 관념은 '경합적 다원주의'다. 그것은 해방에 대한 약속이 더 이상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오늘날의 탈근대 조건에서도 민주주의가 여전히 더욱 깊어지고 확대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민주파 정치인들은 맑스주의적 좌파가 실패한 자리를 합리적 대화와 이성적 숙의를 강조하는 '제3의 길'로 메우려 했지만, 그것은 커다란 패착이었다. 맑스주의를 넘어선 급진적이고도 민주적인 대결정치에 대한 전망의 부재가 오히려 그들을 점점 더 왜소하고 초라한 영역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탈근대 정치학자 무페가 말했듯이, 경합적 다원주의는 모든 민주주의적 요구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필연적 이행을 상정하는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것은 최근 맑스주의를 대체하여 민주주의란 시민들 사이의 이성적 토론과 심의를 통한 합의의 형성과정이라고 설교하는 '제3의 길' 혹은 숙의 민주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경합적 다원주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공공선과 바람직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며, 그 누구도 자신이 믿는 공공선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희생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생활의 모든 규범적 요소를 사적인 도덕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공적인 정치의 영역은 그 어떠한 규범적 측면도 배제된 순전히 도구적 절차적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합적 다원주의는 정치 영역에 규범의 요소를 도입하여, 개인이 사회의 부당한 강제와 억압을 막아내고 개인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시민의 덕목을 함양하고 공공의 기능을 수행하며 정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경합적 다원주의에서, 정치적 행위의 문법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규범은 '자유'와 '평등'이다. 그런데 개인의 사적 도덕규범의 올바름을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듯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규범에 대한 보편적으로 타당한 의미규정과 해석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정치의 공간에서 무엇이 참된 자유이며 무엇이 진정한 평등인지에 대한 해석의 다원성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상이하고 이질적인 해석들이 서로 경합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해석이 여타의 해석을 압도하면 그것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고 '객관적인' 해석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도 오직 일시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든지 여타의 해석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경합적 다원주의 정치의 핵심이 놓여있다.
경합적 다원주의에서, 정치의 본령은 '그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집합 정체성을 창출하고, '대결자들' 사이의 민주적 대립 전선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무페가 말했듯이, '정치적인 것'이란 '인간관계에 고유한 적대'를 지칭하며, '정치'란 항상 적대적이고 갈등적인 조건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다. 적대와 대결은 정치가 벗어나려도 벗어날 수 없는 근본 조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지배적인 민주주의 관념들인 '총합(aggregative) 모델', '숙의 모델', '제3의 길 모델'은 너무나도 탈정치적이다. 그것들은 정치를 기본적으로 다양한 사회·정치 세력들 사이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서로 타협과 절충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보거나, 시민들 사이의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대화가 지배하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거나, 전통적인 '좌/우' 대결과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 패러다임은 '정치'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 혹은 모든 인간관계에 본래적인 권력 관계와 그로 인한 적대의 차원에는 애써 눈감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합적 다원주의는 '우리/그들'의 대결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근본적 적대 관계를 띨 수밖에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 정치의 핵심이 '우리/그들' 대결이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관념이 바로 '대립자(adversary)' 관념이다. 대립자는 '적(enemy)'과는 달리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며, 반대파를 절멸하거나 파괴해야할 존재로 보지 않는다. '적들' 사이의 대립인 근본적 적대는 '우리/그들'의 대립이 도덕적 '선/악(옳음/그름)'의 차원에서 전개될 때 발생한다. 도덕적으로 조정 불가능한 가치들 사이의 대결은 흔히 극단적인 적대로 귀결된다. 이에 반해, 대립자는 '선의의 적(friendly enemy)', 즉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우리와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려는 존재이다. 대립자는 우리가 그들의 생각과 관념에 맞서 격렬하게 싸울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그들을 민주사회의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상대이다. 이처럼 우리/그들의 대립이 적들 사이의 근본적 적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대립자들 사이의 대결이라는 차원에서 조직될 때, 그것은 적대의 '순화된' 형태, 즉 '경합'이 된다. 그리고 경합적 다원주의 정치의 목적은 적대를 경합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민주적 대결정치를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한국 정치는 근본주의적 적대 논리에 너무나도 많이 사로잡혀 있다. 한편으로, 새누리당과 조선 동아 중앙일보로 대표되는 한국 보수는 모든 사회적 논란에 반공주의라는 이념을 덧씌우고, 자신과는 다른 입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로, 따라서 배제하고 절멸해야 할 '적'으로 보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 논리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통합민주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개혁 세력은 '선의의 적' 혹은 대립자들 사이의 경합적 대결로서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정치의 본령인 '우리/그들' 사이의 모든 대립을 너무나도 자주 '적들' 사이의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대립으로 간주하고, 하릴없이 이성적 대화와 합리적 토론을 주문하는 자유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양대 선거를 앞둔 한명숙, 문재인, 임종석, 이인영 등의 민주통합당 지도자들이 얼마나 노무현식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를 극복했는지 알 수 없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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