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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수원특례시, 자료 부족 등 이유로 잊혀지는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추진

부족한 자료·사라진 행적 등 보강해 포상 신청 등 적극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시민문화제에서 수원시민들이 방화수류정에서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수원특례시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수원특례시가 잊혀지는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수원특례시는 수원 출신이거나 수원지역에서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이 합당한 예우를 받으며 잊혀지지 않도록 관련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8일 밝혔다.

이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던 독립운동사의 명예를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서 후손들에게 그 정신이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수원지역은 농민과 상인 및 학생을 비롯해 기생까지 적극 참여하는 등 3·1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 중 하나로, 각종 비밀결사 조직 결성을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 끝까지 항거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인물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자료 부족과 사라진 행적 등으로 인해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가 많은 형편이다.

시는 이처럼 조국을 위한 희생 정신을 기억하고자 지난 2008년부터 수원박물관을 통해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에 착수했다.

그 결과 2009년 수원 기생조합 대표로 기생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던 김향화(1897~미상)의 대통령표창을 수여를 이끌어 낸 것을 시작으로, 학생 신분임에도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려다 체포돼 순국한 이선경(1902~1921)의 독립운동 행적과 순국 사실을 밝혀내 2012년 애국장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현재까지 총 13명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이뤄냈다.

특히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둔 2017년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 1년 동안 수원학연구센터와 함께 국사편찬위원회·국가기록원·국가보훈처 등 관련 기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동시에 여러 증언 자료를 분석하는 등 전문조사를 거쳐 수원지역 독립운동가 113명을 추가로 발굴한 뒤 2019년 15명의 포상을 신청해 9명이 업적을 인정받았고, 2022년에도 7명의 포상을 신청해 지난해 2명이 추가로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올해도 김노적(1895~1963)과 이현경(1899~미상) 등 총 7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한 상태다.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난 김노적은 현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에서 초등과와 고등과를 다니던 도중 당시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세환 소장(교장) 겸 소감(교감)과 1919년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획이 발각된 뒤 수원화성(華城) 내 방화수류정 잎아세 횃불시위를 벌이다 주도자로 체포돼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머리 한쪽이 함몰되고, 왼쪽 손목이 거의 으깨져 불구가 됐다.

그럼에도 기차로 통학하던 수원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가고, 졸업 후에는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등에서 교사로 오랫동안 근무하며 신간회 수원지회 창립회장으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1941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교편을 내려둔 뒤 중국으로 떠났다가 1945년 해방되자 귀국했다.

1899년 수원면 산루리에서 출생한 이현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며 2012년 수원시의 노력으로 애국장 포상을 받은 이선경의 언니로, 1917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남 밀양에서 교편을 잡던 중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생활하던 가운데 만세운동 2주기이던 1921년 3월 1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140여 명의 유학생들과 만세운동을 펼친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됐다.

약 11년간 일본에서 지내며 삼월회 등 여성운동 단체 활동을 하다 귀국한 이현경은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편 안광천과 중국으로 망명해 1930년대 초까지 김원봉과 함께 베이징에서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후 행적은 물론 생사 조차 확인되지 않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시는 이처럼 항일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한 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관련 자료와 행적을 보강했다.

시 관계자는 "후손이 없거나 증거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들의 공로를 발굴해 그들의 희생이 잊혀지지 않도록 앞으로도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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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표

경기인천취재본부 전승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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