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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마당의 백송(白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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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마당의 백송(白松)

[기고] 겨울잠에서 깨 활력을 되찾길 바라며

헌법재판소 탄핵심리에 연일 관심이 몰리고, 뉴스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일부러 검색해 이름을 찾아봤습니다. 헌법재판관 김형두.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부드럽고 나즈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묻습니다. 예의갖춰 질문하고 치밀하게 신문합니다. 핵심만. 초간결하게. 물론 예단 없이. 문형배 소장대행도 엄정한 선비의 면모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흰머리 흰눈썹이 시선을 끄는 정형식 재판관은 집요함과, 칼같이 각잡힌 깐깐함 그 자체더군요. 다른 재판관들도 정중하게 극존칭을 쓰며 묻고 말합니다. 증인과 참고인, 그리그 이들을 압박하거나 캐물어야 하는 양측 대리인단 변호인들도 예의갖추려 애쓰는 게 확연합니다. 피소추인(윤석열)이 저렇게 공손한지(공손한 척일수도 있겠지요), 공손할 수도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재판정의 이런 극존칭과 정중함과 격조가 헌재여서 그런 건지, 헌재만 그런 건지…. TV 녹화중계를 의식해 극존칭 예의를 차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 민‧형사 법정과는 사뭇 다른 상호 정중함에 자못 놀라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이렇게 정중한 가운데 수준을 유지하는 신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실망스러운 대목도 있습니다. 내란 혐의 형사재판을 구실로 "답변이 제한됩니다"라는 비문법적 한국어를 계속 되뇌며 묵비로 일관하는 사령관들과, "계엄이 (겨우) 두 시간 만에 끝났으니 별 일 아니고, 피해도 없으니 내란은 더더욱 아니"라는 피소추인의 변명과 발뺌, 책임떠넘기기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일부 소송대리인(변호인)보다 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발음과 문장도 똑 부러진 홍장원(전 국정원 1차장) 증인도 시선 강탈자였습니다. 등을 직각으로 세워 꼿꼿하게 앉아 AI급 기억력과 빈 틈 없는 논리로 대통령측의 추궁을 압도해 화제가 됐지요. 피소추인(윤석열)이 직접 나서 홍장원 증언을 공박하더군요.

홍장원 증인을 보고있자니, 다리미질 자국이 칼같이 서있는 제복의 바지가 연상되더군요. 그가 정형식 재판관과 벌인 국어사전 설전은 올림픽 탁구 결승전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조금 김이 빠졌습니다. "방첩사령관의 검거 요청이 아니라 검거 지원요청인데 왜 '지원' 두 글자를 빼고 검거라 메모했느냐"는 정 재판관의 추궁은 번짓수가 틀린 집요함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트집같더군요. 자구(字句) 천착이 지나쳐 급기야 활자에 매몰돼버린 훈고학자같았습니다. '그 두 글자가 대통령 탄핵여부를 가를 만큼 과연 중할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는 긴장이 감돌았지요. 결국 홍장원 증인이 '네…그 말씀이 옳으십니다'라는 듯, "(아무리 급박했더라도) 메모를 엄밀하고 정확하게 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서야 비로소 법정의 국어논전은 끝났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엄정하면서도 신속하게 결론을 내려, 나라와 국민이 비상계엄내란의 충격을 "싹 다 정리하는" 기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는 '국정 겨울잠' 상태가 두 달 넘게 지속중입니다. 앞으로도 최소 석 달은 더 갈 것 같습니다. 더 걱정인 것은,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이는 조기 대선에서 어느 정파가 승리하든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지금같은 정치적 내전상태가 완화되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진영 대결의 정점 구간에 장기 교착돼있기 때문입니다. 서부지법 난동 등 극우 폭력이 레드라인을 한참이나 넘어서고 있습니다. 헌재 최종결정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아직도 계엄이 발령된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의 황당함과 경악, 두통이 생생합니다.

모든 역사에는 그 자체로 상징이 되는 숫자가 있습니다. 3‧1, 8‧15, 4‧19, 5‧16, 10‧26, 12‧12, 5‧18, 87년 6월, 4‧16…. 여기에 12‧3이 추가됩니다. '선 무당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12‧3 비상계엄이 그랬습니다. '역사의 모르스 부호'가 된 숫자들을 열거하고 보니 쿠데타가 세 번이나 되는군요. (물론 이승만 시절에도 계엄이 여러 번 발령됐죠. 너무 잦아서 숫자에서는 뺐습니다.)

서울 북촌 가회동 헌법재판소 마당에는 흰 소나무, 백송(白松)이 한 그루 있습니다. 희귀해서 팻말도 달고 있는 보호수지요. 백송은 기상과 고절의 상징이랍니다. 민주공화국의 기상을 다시 세우는 명징한 심리결정문이 헌재에서 곧 낭독되기를 기대합니다. 내란 후 나라와 국민의 일상이, 마치 신진대사를 최소화하며 겨우 생명현상만 유지하는 겨울잠과 흡사합니다. 겨울잠에서 깨 활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곧 봄입니다.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7차 변론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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