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해직자 김주중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내에서 서른 번째 죽음이다. 생활고에 시달려온 고인은 복직이 이뤄지지 않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으나 여전히 쌍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쌍용차 해직자들은 문재인 정부가 나서서 쌍용차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와 쌍용차 범대위는 3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폭력, 재판거래, 정리해고가 쌍용차 30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대한문 앞에 고(故) 김주중 씨의 분향소를 설치했다. 보수단체 회원 10여 명이 물리력을 동원해 분향소 설치를 저지하려고 했다.
고인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고(故) 김주중 씨는 2009년 6월 정리해고 통지를 받고는 이에 저항하며 옥쇄파업에 참여했다. 77일간 이어졌으나 결국, 공장 내로 진입하는 경찰특공대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집단폭행을 당하고 구속됐다.
고인은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회계조작 의혹이 있었다. 정리해고를 할 때 제시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도 입증되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은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고인이 참여한 옥쇄파업 역시 불법파업 혐의를 벗었고 경찰특공대의 물리력이 되레 불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전히 고인과 그의 동료들은 폭도들이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고인을 비롯한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16억7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경찰의 강제집행 과정에서 헬기와 기중기 등이 노동자들에 의해 파손됐다는 것. 법원은 경찰이 제기한 금액 중 약 11억6800만 원을 노동자가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 꼼짝없이 고인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그 돈을 배상해야 한다. 이 소송으로 조합원 67명에 대해 임금 및 퇴직금에 가압류가 걸렸고, 조합원 22명에게는 부동산압류가 걸린 상황이다.
이러한 손배소 제기를 두고 이중처벌이라는 지적도 제기됐었다. 고인을 비롯해 많은 파업참가자들이 옥쇄파업으로 형사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파업으로 94명이 구속됐고 300여명이 벌금 및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손배가압류까지 더해지니 이중고, 삼중고다.
고인은 해고 이후 새 직장을 찾아다녔으나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쌍용자동차 파업참여자라는 딱지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러면서 빚은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고인은 새벽에는 화물차를 운전하고 낮에는 공사일을 하면서 빚을 갚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2015년 12월 30일 쌍용자동차 노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했으나 이 역시도 희망고문이었다. 2016년 2월 1일자로 18명. 2017년 4월 19일자로 19명 등 총 37명이 들어갔다. 아직 나머지 복직 대기자가 130명 남아있다. 그 대기자 중에는 고인도 포함돼 있었다.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다.
해고자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쌍용차 사태 국정조사와 해결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도 1년이 지나도록 쌍용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경찰의 살인진압 진상조사를 신속히 이뤄지지 않았고, 정부의 손해배상 소송도 취하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폭도로 몰렸던 김 조합원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며 "이 과정에서 해고노동자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2012년 4월5일 22번째 희생자를 내면면서 설치했던 대한문 분향소를 다시 설치한다"며 "그 사이 8명이 더 목숨을 끊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은 "지난 10년 동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며 "옥쇄파업 때 공장 지붕에서 벌어진 생존권을 건 몸부림은 특공대 진압으로 쫓겨났고, 이후 우리는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이후 우리는 생계를 위해 흩어졌으나 쌍용자동차 해고자라는 낙인은 주홍글씨로 남겨져 어디에도 발 디디지 못했다"며 "지난 10년 동안 국가가 우리를 어떻게 대했는가. 만약 우리를 껴안아주었다면 그 서른 명이 그렇게 죽었을까"라고 반문했다.
김 지부장은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우리를 폭력집단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을 견디기 어려웠다"며 "(그런 모든 것에 저항하기 위해) 다시 힘들게 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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