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수십 명의 남성들과 9년 동안 지속적으로 강간해 프랑스를 넘어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도미니크 펠리코(72)와 공범 50명에 대한 1심 선고가 19일(이하 현지시간) 내려졌다. 주범 펠리코에게만 강간에 대한 최고 형량인 20년이 선고됐고 대부분의 가해자들에겐 구형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 사건 영상 공개에도 대부분의 가해자가 강간 혐의를 부인하며 강간죄 성립 요건에 동의 여부가 포함돼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졌다.
<뉴욕타임스>(NYT), 영국 <가디언>, 프랑스 24 등을 보면 19일 프랑스 아비뇽 형사법원은 도미니크의 아내 지젤(72)에 대한 성폭력 혐의 재판에서 펠리코를 포함한 51명 피고인 전원에 유죄를 선고했다. 펠리코를 포함해 47명에겐 강간 혐의, 2명엔 강간 미수, 2명엔 성적 폭행 혐의가 적용됐다. 펠리코의 경우 공범 중 한 명의 아내에 대한 강간 미수 혐의, 자녀 등에 대한 음란 사진 촬영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강간에 대한 최고 형량인 20년형을 선고 받은 건 주범 펠리코 뿐이었다. 다른 가해자들에겐 검사가 구형한 4~18년형보다 짧은 3~15년형이 선고됐다. 대부분 가해자에 6~9년형이 선고됐고 일부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2020년 경찰에 펠리코의 성범죄가 포착된 뒤 수년 간의 수사 과정에서 이미 구금됐던 가해자 일부는 낮은 형량이 선고된 탓에 곧바로, 혹은 이른 시일 내에 풀려날 것으로 전망된다.
펠리코는 2011~2020년 아비뇽 인근 마을 마잔 자택 등에서 아내 지젤에게 몰래 수면제, 진정제 등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온라인을 통해 모집한 수십 명의 남성들과 반복해서 강간했다. 이 사건은 2020년 펠리코가 슈퍼마켓에서 여성을 불법 촬영하다 붙잡힌 별도의 성범죄 조사에서 경찰이 펠리코의 전자기기에서 지젤에 대한 집단 강간 장면이 담긴 2만 건에 이르는 사진과 영상을 발견하며 드러났다. 지젤은 해당 영상을 경찰이 발견해 고지한 뒤에야 자신이 의식을 잃은 채 강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이 펠리코가 촬영한 영상을 통해 파악한 가해 남성의 수는 72명이지만 나머지 21명은 붙잡히지 않았다. 지젤은 현재 펠리코와 이혼한 상태다.
지난 9월 시작된 재판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공개 재판을 받은 지젤은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우리(피해자)가 아니라 그들(강간 가해자)"라며 성폭력 생존자들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펠리코가 범행을 촬영한 탓에 사건 증거가 풍부했고 일부 영상은 지젤의 동의 아래 법정에서 공개됐지만, 펠리코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해자는 혐의를 부인했다. 혐의를 인정한 가해자는 15명 정도다. 다른 가해자들은 의식을 잃은 상태의 지젤이 성행위에 동의했다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가해자 쪽 변호인 중 한 명인 기욤 드 팔마는 "프랑스에선 (법적으로) 강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피해자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며 "강간할 의도가 없으면 강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펠리코는 자신이 초대한 남성들이 강간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강간죄 성립 요건에 명시적 동의 여부가 포함돼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졌다. 프랑스 법은 강간이 "폭력, 강압, 위협, 기습"에 의해 성립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의 여부에 대해선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3월 강간의 정의에 동의 여부를 포함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도입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 국가들에선 피해자의 거부 여부가 아닌 명확한 동의 여부를 강간죄 성립 요건으로 보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확산하고 있다. 가해자의 강압 및 피해자의 저항에 중점을 둔 기존 강간 개념에서 동의('only yes means yes')에 중점을 둔 개념으로 전환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더 적극적으로 보장하려는 취지다.
2022년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스페인의 경우, 2016년 18살 여성을 집단 강간한 남성들에 강간죄가 적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가 커진 뒤 법 개정이 이뤄졌다. 1심 재판부가 피해자가 술에 너무 취해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을 빌미로 20대 남성 5명으로 이뤄진 가해자들에 강간보다 가벼운 성적 학대 혐의를 적용하자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었다. 이후 2019년 대법원 판결에선 강간 혐의가 인정됐다.
펠리코 재판의 51명의 가해자들은 펠리코를 포함해 20~70대에 걸친 연령, 농장 노동자부터 언론인, 지역 의원까지 다양한 직업, 기혼 및 유자녀, 미혼이 섞인 다양한 결혼 상태에 걸쳐 있어 어떠한 공통적 특성으로도 묶이지 않아 프랑스 언론에서 "미스터 에브리맨(보통 남자·Monsieur Tout-le-monde)"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는 강간 가해자는 '괴물'이라는 기존 믿음이 부정확하고 남성들 사이에 강간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싣는 근거다.
지역 사회 곳곳에서 '평범하게' 직업 및 가정 생활을 영위해 온 가해자 중 일부는 지젤에 대한 강간 혐의 재판에선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 등을 배경으로 부각하기도 했다.
가해자 쪽에선 형량에 만족하는 분위기가 나왔다. 프랑스24는 가해자 2명을 대리한 변호인 롤랑 마빌로가 "형량이 조정됐고 이는 좋은 일"이라며 "내 의뢰인 중 한 명은 당장 수감되지 않을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몇 주나 몇 달이면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동의에 대한 논쟁이 재판을 지배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지젤에게 힘을 보태 온 여성들과 전문가들은 형량이 낮게 선고됐다며 비판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법률 전문가 카트린 르 마게레스는 "오늘날 강간에 대한 평균 형량은 11년 몇 개월 가량"이라며 이번 재판이 특별한 주목을 끌었고 "특히 비열한 방식의 강간"이라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대부분의 피고인들에 "평균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피고인에 유죄가 선고돼 "안도"했다면서도 "특정 결정과 그 결정의 심각성 부족에 대해 놀랐다"며 "프랑스 형법에 성적 접촉을 시도한 사람이 상대방이 어떠한 강압도 없이 동의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면 피고인들이 (지젤이) 동의했다고 믿었다는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직장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비그디스 모리스는 <로이터>에 "어떻게 강간죄가 인정된 특정 남성들이 3년 뒤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나? 그게 나를 정말 많이 괴롭게 한다"고 토로했다.
영국 <더타임스>는 펠리코의 자녀들도 형량이 "낮게" 선고됐다며 비판했다고 전했다.
'맨스플레인(mansplain·남성이 여성을 얕잡아 보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라는 용어를 확산시킨 미국 작가이자 활동가 리베카 솔닛은 <가디언> 기고를 통해 이번 재판 과정에서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남성들은 어떤가"라고 지적하며 "진정한 변화는 남성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문화에 참여할 때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고를 통해 "페미니즘은 지난 60년 동안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데 놀라운 성과를 거뒀지만, 남성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건 여성의 일이 아니다"라며 "많은 남성이 페미니스트지만 너무 많은 남성이 이 재판에서 드러난 종류의 강간 문화에 빠져 있다. 지젤 펠리코 사건이 적어도 이러한 작업, 대화, 변화를 위한 계기이자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영국 BBC 방송을 보면 온라인에서 일부 남성들은 이번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공통된 특성을 찾기도 어려운 "미스터 에브리맨"으로 불린 가운데 모든 남자가 강간법은 아니라는 취지의 게시글을 퍼뜨려 "여성의 고통을 침묵시키는 방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가해자 쪽 변호인 중 한 명은 법정 밖에서 낮은 형량에 항의하는 여성들을 향해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며 전형적 여성 혐오 시각을 드러냈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지젤은 선고 뒤 법정을 나서며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들이 미래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 이 싸움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을 생각한다"며 "우리가 같은 투쟁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존중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함께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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