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9주기 추모식이 22일 서울국립현충원에서 엄수됐다. 여야 정치인들은 민주화 투쟁에의 헌신과 문민정부 초반의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도입 등 고인의 업적을 기리면서도 미묘한 강조점의 차이를 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큰 정치를 실천한 정치인이었다.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사였지만 정치는 함께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선명하게 보여주셨다"며 "'국민을 늘 두려워하라'고 당부하셨고, 국민이 아니라고 하는 일은 사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날 대변인 공식 논평을 통해 "고인은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본인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친족의 사법처리에서도 엄정한 법 정신을 존중했다"며 "고인이 세운 민주주의의 가치와 성과들을 훼손하고 영부인 방탄에만 열중인 윤석열 정부를 보며 안타까워진다"고 한 것과 유사한 인식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대국민담화·기자회견에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과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또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2회 거부권을 행사했다.
우 의장은 이어 "대통령 재임 시절 '가장 어둡고 괴로운 순간에도 의회정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하신 대통령님은 '타협이 없으면 정치가 없는 것이며 정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이는) 지금 우리 정치 현실에도 큰 울림"이라고 했다. 22대 국회에서 여야 간 극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간접 지적으로 읽혔다.
원내 1당인 민주당의 박찬대 원내대표는 고인의 민주화 투쟁 업적을 언급하며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김 전 대통령 탄압은 끝내 유신독재의 종말로 이어졌다"고 했다. 야당 지도자를 탄압한 정권은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고 경고한 셈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5일 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 유죄 판결(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박 원내대표는 또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또다시 심각한 위기다. 그러나 잠시 퇴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진보할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보여주신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당신의 굳은 의지를 굳게 새기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최근 매 주말마다 '김건희 특검 도입'을 주장하는 장외집회를 열고 있다.
국민의힘은 YS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한편, YS정신의 요체가 '변화와 개혁'임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 국정지지율 저조와 여권 내홍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나온 메시지여서 눈길을 끌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추모사에서 "국민의힘은 김영삼 정신을 계승하는 당"이라며 "국민 눈높이에 맞는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함께하겠다"고 했다.
여권 내 쇄신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친윤-친한계 갈등의 당사자인 한 대표는 이날 고인이 던진 정치 화두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언급하며 "옳은 일을 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당신의 삶 그 자체로 보여준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건강 문제로 추모식에 불참한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SNS에 올린 추모사에서 "의회주의자로 보여주셨던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며 "변화와 개혁의 정신을 본받아 미래를 위한 개혁과제를 충실히 수행해나가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곽규택 수석대변인 논평에서 "국민의힘은 대통령님의 정신을 높이 받들어, 국민통합 시대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을 위한 변화와 쇄신을 이끌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전 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그 전신으로 한다. 민주자유당은 YS 재임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고, 이후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을 거쳐 현 당명에 이르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