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지난 9월 25일 연금개혁 관련 브리핑에서 국민연금에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더라도 '낸 돈보다 많이 받고', 세대별 보험료 차등화는 '세대 간 기여와 혜택이 다르므로 이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라며 개혁안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발표된 이후 복지부, 국민연금공단, 개혁안에 동의하는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은 낸 것보다 더 많이 받게 되므로, 더 깎고, 더 내되 나이 든 세대부터 먼저 부담하는 것이 후세대를 위한 공정"이라며 밀어붙이고 있다. 이들은 사회보험 원리로 운영되는 국민연금의 본질은 무시한 채, 개인보험의 원리를 들이대며, 국민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 조성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개혁의 목표가 국민으로부터 국민연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이다.
정부 개혁안 저변에 깔린 국민연금에 대한 인식은 '낸 돈(기여)보다 더 많이 받아 가서 적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까지 가세해서 국민연금은 적은 돈을 내고 많은 돈을 가져가서 후세대에 부담을 안긴다는 식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개인이 낸 보험료를 평가해서 지급하는 개인연금, 즉 사보험이 아니다. 국민연금은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잠재적으로 겪게 될 노후소득 단절로 발생할 빈곤을 예방하기 위해서 집합적으로 운영하는 사회보험제도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소득 활동하는 국민을 의무적으로 가입시키고, 경제활동 기간 내내 보험료를 징수해 간다. 국가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노후소득을 개인이나 가족이 부양하는 방식에서 사회가 집합적으로 부양하는 방식에 국민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약속했던 급여대로 노년에 이른 국민의 소득보장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 방향에 동의했던 시민대표단의 결정을 무시하며, 이제까지 논의된 바 없었던 자동조정장치와 세대별 차등 보험료율을 개혁안의 핵심으로 들고나왔다. 사회보험 운영을 위해서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정의로운 부담과 적정한 급여이다. 이때 부담의 근거는 세대가 아닌, 소득(능력)에 따른 정의이며, 급여는 필요가 발생한 가입자에게 적정하게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보험을 최초로 도입해서 사회보험 국가로 불리는 독일은 우리 사회보다 고령화가 먼저 시작되어 다양한 제도 개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과정에서 핵심으로 다뤘던 문제는 인구구조변화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었다. 물론 고령화의 심화에 따른 보험료율 인상 압력을 줄이기 위해 자동조정장치(지속가능계수, Nachholfaktor)를 도입했다. 고령화로 수급자 규모와 가입자 부담 규모가 모두 증가하므로, 평균임금과 평균 연금 간의 적정 비율을 보장해서 기여와 급여 수준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2025년까지 평균 연금소득 대체율이 48% 이하로 하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018년부터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보험료가 20% 가까이 상승하는 고령화 압력에도 독일은 적립금을 쌓지 않고 부과방식을 고수하면서, 부족한 연금재정을 연방 보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가입자의 규모 및 소득감소, 경제위기, 고령화는 부과방식의 보험료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적립방식일 경우도 이러한 상황에 더 안정적이진 못하다. 독일 연방정부는 '사회보장 2021(Sozialgarantie 2021)'을 결의하면서, 2021년 말까지 사회보험의 총보험료(연금+건강+장기요양+실업)를 최대 40%로 제한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재정을 연방보조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 결정에 대해 독일 정부는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즉 높은 사회보장 기여금이 높은 추가 임금 비용으로 이어져서, 노동력 기반을 약화할 것으로 본다. 인구고령화와 의료 및 기술 발전으로 향후 몇 년간 사회보험료 인상 압박이 커지게 되므로, 국가의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방식은 국민부담률을 높이므로, 근본적으로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주력한다. 노동력 활용 개선을 통해 모든 사회보험 영역에서 추가적인 기여(가입자 확대 및 소득 증대)가 발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노동시장 강화를 재정 안정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에 여성 고용 확대를 위한 세제 혜택과 지속적인 생산성 증대가 사회보험 재정에 절대적으로 유익하므로 임금인상의 필요성도 역설한다.
재정적 위험을 겪고 있지만, 독일은 자동안정화 장치를 만능키로 사용하지 않고, 세대별로 다른 보험료를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보험으로 운영되는 연금제도라도 고령화에 따른 재정압박에 국가는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보험 국가의 원칙으로 '보험료는 연령, 성별, 기대여명, 건강 또는 의료상 위험과는 관계없이 부과하고, 필요 원칙에 따른 급여'가 여전히 금과옥조로 지켜지고 있다.
세대 간 기여와 급여를 내세워서, 특정 세대가 낸 돈보다 많은 급여를 가져간다는 억지가 수용된다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나 국민건강보험제도까지 낸 만큼만 급여를 받도록 하는 막무가내 시장 논리가 확대될 수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현재 수급자들은 기여 이력 없이 급여를 받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좋은 복지로 평가하지, 세대 불공정으로 깎아내리지 않는다.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움의 근원은 초저출생·초고령화이다. 지난 20년간 급격하게 감소한 출생률로 고령화는 빨라졌고 기대여명 또한 증가하여, 미래에 빨간불이 켜졌다. 사회 기반이 변하지 않는다면 50년 후, 보험료를 낼 사람보다 수급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만 국민연금인 국가가 운영하는 사보험은 필요 없다. 국민연금이 사연금이나 적금보다 좋은 점은 물가인상률을 반영해서, 30년 전 납부했던 보험료 가치를 연금급여로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동안정화장치가 도입된다면 물가인상률 반영이 삭감될 수 있다. 이 차관은 '전년도 받는 돈보다 연금액이 늘어난다'고 했지만, 전년도에 100만 원, 올해 101만 원을 받게 된다면 액수 상 인상이지만, 물가인상을 적용하면 사실상 삭감이다. 이에 연금의 실질 가치가 아닌, 연금 액수로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연금 개혁과정에서 적립금 규모와 부채를 내세워 미래부담을 부각해왔는데, 이번 개혁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나이 든 세대에 돌리고 있다. 이는 국민연금 재정문제를 보험료 수입으로만 국한하고, 국가재정을 투입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로로 보인다. 우리가 겪는 문제의 핵심은 초저출생·초고령사회의 사회부양 비용이다. 이를 위해 세대별로 보험료를 차등해서 내고, 국민연금 급여를 깎는다고 대응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많은 분열과 불안으로 아이 낳기가 더 망설여지고,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지 않을까? 사회보험의 원칙을 지키며 개혁할 방안은 여전히 존재한다. 보장성과 보험료 모두를 올려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노인이 빈곤으로 추락하지 않게 할 여력과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 디스토피아로 규정짓기에 지금의 사람과 가치는 지켜낼 만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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