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검은 동백꽃
-전남 영암군 민간인학살 사건
차근차근 앞에서부터
동백꽃 떨어진다
서릿발에 꽂힌 채
꽃봉오리 끌어안고 얼어버린
떼려 할수록 부서지는 몸뚱이
하필 이것이 맞닥뜨린 세상이라니
살아내야 했으니 몽둥이 같은 권력에 빌붙어
나는 죽었소 나는 죽었소
찢긴 세상 속에 숨어 주문을 외울 때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그 뜨거운
이념이 무엇이냐 좌, 우 몰라 앞만 보고 살아온
마을 한 번 벗어나 본 적 없는
빨간 동백꽃이 빨갱이가 되는가
어린아이가 시쳇더미를 기어가
제 어미를 용케 찾아 젖을 빨다 그대로 한 더미가 되어버린
숨이 막혀 눈물도 막히더라
죽은 꽃들을 흙으로 덮으니
누가 무덤을 둥글다 했나
이 길고도 긴 무덤을 바람도 소리죽여 지난다
아궁이에 기어들어가 목숨을 움켜쥔
아직도 씻지 못해 검게 그을린 채 어른이 되었다
붉은 피 섞이고 섞여 검게 되기 전에
역사의 망각과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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