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다 한들 생생하게 복원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은 있다. 내게도 그렇다. 맹렬한 더위의 기세가 이전만 못 하고 문득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질 무렵, 다가오는 9월 달력을 힐끔힐끔 살펴보게 되는 즈음 여지없이 소환되는 이야기. 벌써 7년 전 일이지만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나는 여지없이 그날에 사로잡힌다.
2017년 9월 5일 저녁 7시 30분.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OO초등학교 강당은 인파로 가득했다. 삼삼오오 들어서던 사람들 대부분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알아서들 편을 갈라 왼쪽과 오른쪽에 나뉘어 앉았다. 본격적인 행사가 막을 올리기도 전에 곳곳에서 고성과 야유가 터져 나왔고 현장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초대형 에어컨 몇 대가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그런 열기였다.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주민 토론회.' 강당 전면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 아래로 이날의 토론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각 진영 대표의 모두 발언이 있고 난 뒤로 말과 말이 치열하게 부딪혔다. 특수학교 설립이 간절한 장애 학생 부모들의 호소, 반면에 특수학교 설립을 환영하지만 이곳은 적합지가 아니라는 주민들의 결기. 고작 학교 하나(?)를 두고서 양측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마냥 진력을 다했다. 나는 그토록 처절했던 '언어의 백병전'을 다시는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토론회가 열리기 얼마 전 우연히 관련 소식을 접하고서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학교를 지을 수 없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조촐하게 촬영 장비를 챙겨 나섰던 발걸음 하나가 이토록 오랜 내 삶을 뒤흔들 줄이야….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특수학교 설립에 앞장선 장애인 부모님들의 여정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학교 가는 길'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지어진 서진학교는 2020년 무사히 문을 열었다. 현재는 200명 남짓한 학생들이 꽃처럼 아름답고 별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비와 난관이 가로막았지만, 부모님들은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랑과 용기, 그리고 지혜로 주춧돌을 놓았다. 특히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세상 그 무엇으로 지난했던 세월을 견뎌냈을까 싶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반드시 언급해야 할 분들이 계신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비롯해 많은 서울시 교육청 구성원이 강단 있고 뚝심 있게 학교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도를 넘는 항의와 집단행동이 끊이지 않았지만 반대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선출직 단체장이 이끄는 조직은 아무래도 다수의 목소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특수학교 설립에 대해 그간 대부분의 교육계 수장들이 사실상 일부러 외면하거나 주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희연 교육감이 이끄는 서울시 교육청은 누가 봐도 힘든 선택을 했다. 비록 소수의 바람일지언정, 그것이 옳고 정의로운 일이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본 우여곡절이야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장애 학생들을 포함해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철학, 열정과 헌신이 결국 아주 큰 산을 옮겼다. 그의 임기중 서진학교뿐만 아니라 나래학교가 개교했고 특수교육 전반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니 조희연 교육감과 그 일을 함께한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이제 곧 다시 9월이다. 조만간 서진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가을볕을 쬐며 깔깔대고 까르륵하고서 맘껏 웃지 않을까? 푸른 하늘을 수놓는 웃음을 보며, 정의를 위해 소수자와 손잡았던 조희연 교육감과 교육청 관계자들을 떠올리겠다.
오늘, 조희연 교육감이 물러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된 교사들이 다시 교단에 서도록 한 결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정치적 이유로 해직된 교사 역시 교육계의 소수자다. 조희연 교육감은 이번에도 소수자와 함께하다 고난을 겪게 됐다.
시민 조희연의 앞날에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조희연은 떠나지만, 고난과 고립을 무릅쓰며 약자, 소수자가 '학교 가는 길'을 열었던 그의 정신은 교육계에서 살아 숨쉬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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