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철현 선생의 '못 다 이룬 거사' …늦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기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철현 선생의 '못 다 이룬 거사' …늦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기를"

['백의민족해방단' 김철현의 숨긴 이야기] ⑤되찾아야 할 명예

고(故) 김철현 선생의 ‘백의민족해방단’ 사건과 관련된 육필 원고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전북자치도 부안군 주산초등학교의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동문과 재직교사, 주민 등을 상대로 관련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였다.

김철현 선생은 대대로 부안군 주산면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주산초등학교에서도 두 차례 이상 근무를 했었다.

김 선생은 본관이 광산으로 아버지 김재식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재식은 자가 인규(仁奎), 호는 구산(龜山)이며 고종 연간인 1886년생으로 일찌감치 가업을 일으켜 지역에서 비교적 넉넉한 삶을 살았다.

▲춘천사범학교에 다니던 10대 후반에 항일조직인 '백의민족해방단'의 일원이었던 김철현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과 부모님. ⓒ유족제공

김철현 선생의 생년은 1926년이라고도 하고 1928년이라고도 하는데 생전에 선생은 자신의 호적이 2년 늦게 되어 정년이 남들보다 2년 늦어졌다고 하니 1926년생이 맞고 호적이나 공식기록에는 1928년으로 등재되어 있다.

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선생은 자신의 형(김종현)을 따라 춘천에서 유년과 청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형인 김종현은 주산초등학교가 개교한 1924년에 제1회로 입학해 4학년을 마친 뒤 줄포보통학교와 정읍농림, 사리원농업학교를 졸업을 하고 사범학교로 진학해 교사가 됐다.

교사가 된 김종현은 열 살 아래의 동생인 김철현 선생을 데리고 임지인 강원도 춘천으로 가서 본정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김철현 선생은 1941년 심상소학교를 마친 뒤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전액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된 춘천사범학교에 3회로 입학해 '충실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길러내는 훈도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김철현 선생은 3학년 여름 무렵(1944년 8월) 친구와 함께 '백의민족해방단'이라는 무장봉기단체에 자발적으로 가입해 조선의 독립에 헌신하기로 맹세한다.

백의민족해방단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스스로 멸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내부에서 사보타지와 소요를 일으켜 외부의 독립운동 세력에 힘을 보태자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1945년 봄에 강원도 회양군의 모처에서 소요를 일으킬 목적으로 주재소 습격 등의 거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인근 철원지역에서 백의민족해방단 일원이었던 중학교 교사가 검거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일제에 의해 일망타진돼 광복이 되던 1945년 8월15일까지 옥에 갇혀 매일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과 폭행, 집단 구타를 당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선생은 사범학교 5년 과정을 마치고 미군정청하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선생은 이후에도 자신의 호인 '일야(一也)'를 실천하려는 듯 한 길로 꾸준하게 민족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와 괸련된 뚜렷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선생은 말년에 춘천교육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로부터 '백의민족해방단 사건'과 관련한 원고를 의뢰 받아 기고를 하면서 말미에 '거사 한 번 못해본 주제에 차마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어 입을 닫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선생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말씀은 일체 하지 않으셨으나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다"면서 "아마도 당신의 그 활동이력이 자식들의 앞길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입을 닫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은 '시골학교 선생'으로 부안과 김제 일대의 초등학교에 봉직하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사랑으로 길러낸 뒤 1993년 교단을 떠났다.

그 뒤 선생은 갑자기 찾아든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96년 영면에 들었다.

▲말년의 김철현 선생 모습. 1996년 작고하던 해 본인이 영정사진에 쓸 요량으로 촬영해 둔 것이라고 한다. ⓒ유족 제공

선생의 자녀 가운데 둘째 아들인 영표(1968년생)는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도 하지 않고 노동운동과 농민, 환경운동을 비롯해 다문화가정의 주부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 약자와 이웃을 위한 활동을 펼쳐오다 채 5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요절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오는 30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 부안 주산초등학교에서는 기념식에서 1926년 있었던 선배들의 '동맹휴교'사건과 이 학교에 근무했었던 김철현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추념행사를 별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는데 힘을 쓴 김인택 주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은 "김철현 선생님의 삶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공의(公義)'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었던 그 정신을 이번 100주년 기념식을 통해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채수택 주산면주민자치위원장은 "나라를 되찾은 지 79년이나 지나서야 선생님의 항일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됐다"면서 "비록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유족들과 함께 선생님의 독립운동 공적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