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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고개숙인 간수와 일본 검사…태극기 물결 속에서 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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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고개숙인 간수와 일본 검사…태극기 물결 속에서 생환

['백의민족해방단' 김철현의 숨긴 이야기] ④교사가 되어 잊힌 독립투쟁사

끔찍하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고통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은 도둑처럼 다가왔다.

김철현 선생은 그 광복의 시간에 철원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3월에 붙잡혀 들어갔던 춘천사범의 ‘백의민족해방단’ 40여명은 그 해 4월에 창궐한 장티푸스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밖에 있는 일반인들도 전염성 강한 질병에 속수무책이었는데 유치장에 갇혀 있는 이들이야 오죽했으랴.

6월에는 감방 내에 있는 변기를 뜯어 곤봉으로 만들었다가 간수가 들어오자 내리쳐 기절 시킨 뒤 옥문을 부수고 탈옥을 시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이들의 감시의 눈초리는 더욱 빛났고 밤에 이뤄지던 취조를 빙자한 고문의 강도는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러다 광복은 꿈결처럼 거짓말처럼 조용히 찾아왔다.

김철현 선생의 기고문을 다시 보자.

이 사건으로 검거된 단원이 40여명, 당시로서는 적지 아니 큰 사건이었다. 광복의 해 여름은 무던히도 더웠다. 8월15일 밤 늦게 간수인 미야꼬가 다가오더니 일제 패망 소식을 귀뜸해 주었다. 아주 간사한 놈이었다.

이윽고 16일 아침 풀죽은 일본인 검사가 나타나 전원 석방을 전해주었다. 한 줄기 통한의 눈물이 뺨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철원 하늘! 아니 조국의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한 점 둥실 떠 있었다.

김철현 선생의 기고문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편지글에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온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8월15일 밤이었습니다. 항상 그 질이 좋지 못한 미야꼬(都) 간수가 어쩐지 이상하리만큼 달라진 채 내 옆에 오더니 나보고 만일 석방이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게쓰냐고 묻더군요. 질문치고는 참으로 가소로웠습니다. 전시하의 반일사상범으로서 구속된 관련자가 40여명에 이르는 큰 사건의 피고들인 우리가 석방될 수 없음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터라 미야꼬 간수의 말이 정말 터무니 없고 도리어 몸서리 쳐지는 것이었지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헌데 그날 밤 늦게 그 미야꼬 간수가 다시 찾아와 이제는 '오늘 낮에 천황폐하가 항복방송을 했다'고 종전사실을 귀띔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이라는 이 엄청난 시류 속에서 그렇게도 당당했던 ‘간수 나리’의 간사함이 비굴하게 반조(返照)되는 것을 못본 채 어머니의 여윈 모습이 내 망막에 어리는듯하더니 한줄기 눈물이 내 여윈 뺨에 회한처럼 성기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16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오전에 일본 검사가 출두하여 40여명에 이르는 우리 모두를 모아 놓고 훈시랍시고 무어라 말을 하면서 전원석방이라 했습니다. 특히 강도 건은 그것이 단순강도가 아닌 독립운동과의 연관을 인정하여 이를 기소취하하여 석방하는 것이라 하며 마지막 안간힘으로 그 권위를 지탱하는 듯 했습니다만 그렇게 기광(欺誆)이 퍼렇던 검사조차 마냥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철원경찰서를 나와 그곳이 집인 학우의 집으로 가서 환대를 받으며 2일간 쉬다가 19일 서울을 거쳐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춘천으로 오는 기차 속에서나, 지나온 역사(驛舍)에서나, 서울역(당시는 경성역) 어디서고 넘치는 태극기, 태극기가 보였습니다. 그 물결을 헤집고 춘천에 도착한 우리를 많은 동족과 학우, 은사님들이 모두 반기어 주었습니다.

김철현 선생은 그 이후 1945년 가을 결혼을 하고 이듬해 광복을 맞이한 조국에서 춘천사범을 졸업한 뒤 교사로 임용된다.

1948년에는 동국대학교 문학부에 입학을 했으나 얼마나 다녔는지는 6.25전쟁으로 인해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정년이 될 때까지 부안군과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등을 오가며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부에서 선생이 광복 전후에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기록이나 물증,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1993년 2월에 열린 김철현 선생의 정년퇴임식 모습. 가족과 제자, 동료 교사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김철현 선생은 이날 감격과 회한을 동시에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유족

김철현 선생은 1993년 많은 동료와 후배, 제자, 가족들의 축하 속에 교직에서 은퇴한다.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김철현 선생은 1996년 10월4일 오전 7시15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든다.

향년68세, 비운의 독립투사였으나 누구도 알지 못했던 ‘평생 교사’김철현은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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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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