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밤중에 고춧가루 물을 먹이고 다시 토해내게 반복하던 끔찍한 고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밤중에 고춧가루 물을 먹이고 다시 토해내게 반복하던 끔찍한 고문

['백의민족해방단' 김철현의 숨긴 이야기] ③모진 고문과 뜻밖의 광복

김철현 선생은 18살의 어린나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철원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언제 자신을 엄습할지 모를 모진 고문의 공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앞서 백의민족해방단원들이 일거에 일경에 체포된 배경을 알리없었던 어린 독립군들은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운 나날이었다.

이어지는 김철현 선생의 회고를 따라가 본다.

우리의 조직이 무너진 동기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우리와는 다른 루트를 타고 철원읍내에 조직된 조직원 중에 김모씨라는 당시 철원중학교 현직 교원이 있었다. 김모 교사가 주동이 된 이 조직에서 활동자금 조달을 위해 철원읍 일본인 악질 거상을 습격하다 발각이 난 것이다.

현직 중학교원이 낀 강도행위를 이상히 여긴 왜경의 모진 고문에 의해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며칠 후면 강원도 회양군 산간 모처에서 전 조직원이 집결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등부터 습격해 대대적인 봉기활동에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아, 천추의 한이여! 거사도하기 전에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춘천사범학교에 재학중일 당시 김철현 선생과 친구들. 김철현 선생이 보관해 오던 사진으로 이 가운데 누가 김철현 선생인지는 불분명하다. ⓒ유족제공

사실 ‘백의민족해방단’의 목적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1. 왜제(倭帝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한다. 그 패망을 촉진하기 위해 국내에서 사보타지와 소요를 주도한다.

2.국외의 독립투사들에게만 투쟁을 의지할 수 없다. 국내에도 투쟁세력이 엄존함을 국내외에 알리고 민족의 사기와 나아가 민족봉기를 유도한다.

이것이 1944년 8월 일제패망을 꼭 1년 앞둔 혼돈과 절망의 시기에 태동한 백의민족해방단이 내건 분명한 투쟁의 목표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강원도 철원과 김화, 회양, 춘천 등지에서 조직이 꾸려지고 일거에 힘을 모아 소요를 일으킬 움직임에 사전에 제지를 당했으니 끓어오르던 청년들은 분노와 공포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김철현 선생은 이를 ‘독립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거사를 앞둔 시점에 돌연 붙잡혀 동족형사의 구둣발에 채이고 짓밟히고 있는 통분함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라고 분개했다.

어린 독립투사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일반 성인들에게 끔찍한 만행이었다.

철원경찰서에 수감되자 목덜미까지 내리덮이는 검은 자루를 뒤집어 씌웠다. 따라서 구속되어 있는 동지가 누구인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취조실에 끌어 낼 때에도 죄수 번호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긴 장대로 해당자의 가슴을 사정없이 쿡쿡 찌를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불려나갔는지 들어 왔는지를 서로 알지 못했다. 잠결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신음소리에 또 우리 동지 하나가 당했구나 생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밤중에 취조실에 끌려 나간 나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고문을 겪어야만 했다.

비행기태우기(거꾸로 매달기)나 주리 틀기(손가락이나 무릎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뒤틀거나 내리밟기),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고춧가루 고문이다.

방독면을 씌우고 그 흡입구를 고춧가루를 푼 물에 처넣는 것이니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가 없고 그러자니 고춧가루 물이 코로 입으로 뱃속으로…. 고춧가루 물로 배가 불룩해질 즈음이면 나는 실신하고 만다. 그러면 나를 뉘어놓고 배 위에 널판자를 깔고 그 위를 발로 구른다. 뱃속에 가득 찼던 고춧가루 물이 다시 쏟아져 나오면 나는 다시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다. 정신이 든다지만, 입과 코, 식도, 기도, 위 속의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살아 나온다.

그마저도 어찌어찌 견뎌낼 수 있으나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의 집단구타였다.

여러 놈이 둘러서서 눈을 가린 나를 몽둥이며 구둣발로 치고 패고 차고 짓이길 때면 '이제 죽는구나'하고 체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때 우리를 취조했던 왜경은 堤(쓰스미)고등계장과 平山(히라야마), 柳(야니기) 두 형사, 都(미야꼬)라는 간수 등이 지금도 생생하다.

끔찍하게 이어지던 한밤중의 구타와 고문이 이어지던 어느날 저녁 미야꼬 간수는 김철현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1945년 8월15일의 밤이었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