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철도의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최근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의 공약이 현실화된다면 20여개로 쪼개져 민영화된 영국의 철도는 30년 만에 재국유화(Renationalise)된다. 철도의 종주국이자, 철도민영화의 대표주자격인 영국에서 최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영국 철도는 코로나 이후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영국 철도의 승객 수는 1872년 이후로 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급감했다. 2019~2020년 동안 영국에서 철도를 통한 여행은 총 17억 건이었으나, 2020~2021년에는 22%수준인 3억8800만 건으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철도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100억 파운드 이상을 지출했는데, 이는 폐업 위기에 몰린 민간 철도 운영사의 구제책이었다.
2021년 보리스 존슨 보수당 정부는 '그레이트 브리티시 레일웨이즈(GBR)'를 설립해, 이 기관에서 모든 철도 인프라를 소유하고, 운임 및 시간표를 결정하며 운임 수입을 총괄징수, 단일 티켓팅 사이트를 운영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를 두고 한국에서는 영국 철도가 재국유화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전체 철도망을 노선별로 쪼개 운영하던 민간운영사들이 이제는 GBR과의 계약을 통해 운영하게 됐을 뿐이다. 한국 언론에 영국철도의 재국유화라고 소개된 보수당의 조치들은 사실 국유화와는 거리가 멀다.
필자는 최근 치러진 영국 총선 직전인 6월 말 영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노동당은 여객철도 부문에 대해 재국유화를 공약했고, 집권 가능성도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단순히 구호에 그칠 공약인지, 아니면 실행가능한 계획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영국 철도의 재국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RMT(The National Union of Rail, Maritime and Transport Workers)노조의 입장도 궁금했다.
런던에 있는 RMT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조나단 화이트(Jonathan White) 정책실장은 "보수당이 추진하고 있는 GBR 설립은 기존 민간운영사를 유지하는 방식"이라며 "GBR은 관료적인 기구로서 운영사를 관리, 감독하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보수당의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영국 철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운영사의 공영화' 정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 내 여론조사 결과, 영국인의 60~70%가 철도는 공공 소유여야 한다고 답했다.
애초 GBR 설립을 위한 정부기구 GBR Transition Team(GBRTT)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GBRTT와의 미팅은 성사되지 못했다. 한편 민간 운영사들은 노동당의 철도 재공영화 공약에 대한 반대 로비활동에 열을 올리는 상황이었다.
민영화 이후 민간운영사 투자, 정부 지출의 1.8% 불과
영국의 민간 철도운영사들은 민영화 이후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승객 수가 증가한 것을 두고 '민영화의 효과'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민영화 논의의 핵심 쟁점인데 조나단 화이트는 "여러 학계 연구를 살펴보면 그 시기는 사실 경제 발전과 굉장히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는 시기였고, 노동 시장이 크게 변화하면서 사람들이 대도시 런던 같은 곳을 선호하게 되고,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게 되는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에 단순하게 민영화 덕분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승객 수가 증가했고, 경기 침체와 함께 승객수는 피크를 찍고 하강했으니, 사실상 민간운영사는 경제성장의 최대 수혜자"라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민영화 기간 내내 민간 운영사들은 정부로부터 엄청난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투자 면에서 거의 한 게 없다고 지적한다. 2006년부터 2022년까지 민간운영사들의 철도 투자는 정부 지출의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민간운영사들은 120%의 수익을 올렸고, 수익의 65%는 배당금으로 빠져나갔다. 조나단 화이트는 "민간운영사들은 주주들한테도 대놓고 '우리는 투자하지 않는다'고 밝히는데, 자본 리스크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민영화 이후 열차를 운영하는 민간 기업들은 자본 리스크를 전혀 갖지 않고, 인프라를 운영하는 쪽에서 리스크를 지다 보니 그 결과 거의 재난에 가까운 수준으로 투자가 없었다. 이는 사망 사고를 포함한 열차 사고 증가를 불러왔다.
"집권 후 5년 내 철도 재국유화하겠다"
이번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당이 된 노동당의 공약은 여객부문의 민간운영사들과의 계약을 순차적으로 해지하여 집권 후 5년 내 재국유화하고, 시설과 운영으로 분리된 철도시스템을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철도 재국유화 과정에서 비효율과 분열을 종식시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비용 절감 효과가 연간 약 15억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금을 비롯해 현재 민영화 체제에서 발생하는 중복비용 등 6.8억 파운드를 합하면 무려 22억 파운드(약 4조원)를 아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재공영화 시민운동단체인 'We own it'에 따르면, 15억 파운드면 영국 철도요금을 18% 인하할 수 있고, 100마일의 새로운 철도노선을 건설할 수 있다. 참고로 인하대 김태승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코레일과 SR을 통합 운영할 경우 연간 약 1000억원(국토부는 400억까지 인정한 바 있다)의 중복비용을 아낄 수 있다.
'Getting Britain Moving-영국철도를 위한 계획'에서 현재 영국 교통부 장관이 된 루이스 헤이는 기존 보수당 정권에서 이루어진 지난 30년간의 철도민영화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루이스 헤이는 노동당의 계획이 "철도운영자를 공공 소유 및 통제 하에 두는 통합적이고 단순한 거버넌스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며, 차기 노동당 정부는 영국의 철도 인프라와 서비스, 일상적인 운영 제공 및 인프라를 보장할 새로운 독립 공공기관인 'Great British Railways' 설립을 공언한다.
루이스의 문서에 따르면 향후 노동당은 노동당 정부의 첫 임기 내에 TOC(Train Operating Companies)를 공공 소유 및 통제 하에 둘 것이라고 한다. 교통부가 TOC와 맺은 모든 계약은 이번 가을부터 2027년까지 만료되는만큼, 교통부는 TOC를 별도의 보상금이나 계약파기에 따른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정부로 가져올 수 있다. 또한 노동당은 운영사들이 승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계약을 조기에 종료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GTX-A노선의 건설 및 관리 운영을 맡은 SG레일의 계약기간 30년과 비교하면 영국의 사례는 그나마 낫다고 얘기해야 할까? 필자가 한국 철도 상하분리 이후 20년간 철도노조는 정부의 철도민영화 정책에 맞서 싸워왔다고 말하자, 조나단 화이트가 말했다.
"10년은 더 고생해야겠네요. 우린 30년 걸렸어요."
다만, 노동당의 계획에서 아쉽게도 화물철도와 롤링스톡컴패니(ROSCO, 철도차량임대회사)는 국영화 대상에서 제외됐다. 'Lumo', 'Hull Train' 등 민간 오픈 엑세스(Open Access, 노선별로 민간에 운영권을 넘기는 프랜차이즈 방식과 달리 한 노선에 복수의 운영사가 진입하여 경쟁하는 방식) 운영자도 국영화 대상에서 제외됐다.
영국의 철도차량은 ROSCO 세 회사가 독점한 상황. 운영사들은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며 차량을 장기 임대한다. 철도차량 임대비용은 열차 운영회사 지출의 약 27%를 차지한다. ROSCO는 2021년까지 5년 동안 연간 2억 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룩셈부르크와 케이맨 제도와 같은 조세피난처에 있는 모회사로 돌아간다. 조나단 화이트는 노조 차원에서 기존 롤링스톡 기업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공영 롤링스톡 기업 설립과 관련한 제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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