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전북자치도 부안군 주산면의 주산초등학교. 1924년 54명이 입학하면서 문을 연 주산공립보통학교는 한때 학생수가 2000명에 육박하는 지역의 거점학교였으나 농어촌지역 거주인구 감소와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2024년 현재 9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소규모학교가 되었다. 그나마 주산면에서는 유일한 학교다. 개교 100주년을 앞둔 이 학교가 특별히 관심을 받는 것은 1926년, 개교 3년차에 발생했던 학생들의 '동맹휴교(同盟休校)사건' 때문이다.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이 그해 6월부터 7월 사이에 세 차례나 집단적으로 등교를 거부했던 이 사건은 지역사회와 교육계 등에 적지 않은 파장이 미쳤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전말이 규명되지 못한 채 후손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전설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프레시안> 전북취재본부는 당시의 기록과 후손들의 증언, 지역 주민들의 구술 등을 토대로 동맹휴교 사건을 재조명하고, 98년이 지난 오늘날 왜 그들의 동맹휴교와 같은 의거가 기억돼야 하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1926년 주산보동학교 동맹휴교의 주역들
주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발생한 동맹휴교의 가담 학생들은 1911년부터 1917년 사이에 태어나 1926년 당시에는 아홉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다양했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보호자가 아버지(父)로 되어 있으나 일부는 어머니나 조부, 형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생 보호자들의 직업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대공(大工, 목수나 대목), 상업, 면장, 교원(敎員) 등도 일부 보인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입학 전에 서당이나 인근 사립학교 또는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 근거리에 학교가 생기면서 전학을 한 경우가 많았다.
1926년 당시 3학급에 교사는 송두홍(宋斗洪), 은백기(殷柏基)씨 등 2명과 교사를 겸한 교장 오가와(小川傳三郞) 등 3명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가와 교장은 훗날 학생들의 동맹휴교 사실을 학적부에 기록을 남긴 장본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학적부에 학생들의 동맹휴교 사실을 남긴 사례가 드물어 왜 오가와 교장이 그러한 사실을 남겼는지는 더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오가와 교장은 학생들의 동맹휴교로 떠들썩했던 이듬해 3월 무주군 적상면 적상보통학교로 전근을 명받아 자리를 옮겼다.
한편,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산보통학교의 동맹휴교의 주모자는 김종태(金鍾泰)와 김종두(金鍾斗)형제를 비롯해 남궁진(南宮珍) 등으로 확인된다.
김종태와 남궁진의 학적부는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며 김종두는 주모자 임에도 주산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쳤다.
이들의 아버지 김복철(金福喆, 1880~1959)은 임진왜란 때 호종1등공신록에 오른 퇴우당 김해의 후손으로 뿌리깊은 유학자였으며 부안향교의 직임을 맡아 대성전을 보수하고 <부안읍지>를 편찬하는 일을 맡아 서문을 직접쓰기도 했다.
김종태(1911~1969)는 동맹휴교 직후 주모자로 몰려 퇴학처분을 받았거나 자퇴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태는 줄포보통학교를 옮겨 학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같은 반이었던 최병기의 누이 전주최씨(1909~1985)와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김종두(1914~1986)는 동맹휴교에 가담한 직후인 같은 해 7월7일자로 26명 가운데 가장 처벌강도가 높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같은 달 15일 이같은 처분은 '해제'했다고 학적부에 기록을 남겼다.
김종두는 주산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2년 동안 서당교육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때문인지 1학년에 입학해서는 모든 과목에서 10점 만점에 9~10점을 받는 등 매우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조행(操行, 품행)도 가장 높은 등급인 '갑(甲)'을 받았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도 꽤 좋은 성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3학년때는 성적이 5~6점으로 낮아지고 특히 조행 평가는 가장 낮은 '병(丙)'을 받았으니 아마도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찍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류인적(柳仁迪)과 류광적(柳光迪)도 거주지 주소가 같아 형제 또는 사촌사이로 추정된다. 류인적은 서당에서 5년을 수학한 뒤 2학년으로 편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3학년때인 1926년 7월9일 동맹휴교에 가담해 23일간의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같은 달 24일 유기정학에서 해제되었다.
김경철(金炅喆, 1914~)은 대대로 부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향반 가문의 종손으로 성장했다.
그의 증조부인 돈재(遯齋) 김낙구(金洛龜, 1848~1905)는 구한말 승지 윤시영(尹始榮)이 고종에게 특별히 천거해 가선대부 의정부 참정의 직임을 증직으로 받았다. 구한말에는 부안향교의 중심인물이자 부안군 남하면(南下面)의 집강(執綱)을 맡았던 지역 유지이기도 했다.
김낙구가 50세 되던 1897년에 세운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외돈마을의 근성재(勤誠齋)는 처음에 그의 조상들을 모시기 위한 재실이었으나 차츰 주변 유림들의 교유장소와 청년들의 공부방, 남하면의 공무를 위한 회의 공간 등으로 활용되었던 중요한 공간이다.
근성재 문에 있는 현판 글씨는 김낙구의 손자이자 김경철의 아버지인 김형휴(金炯畦)가 직접 쓰고 각(刻)을 했다고 한다.
김경철은 주산보통학교 개교 당시 입학했으며 그 전에 집안의 서당인 근성재에서 2년을 수학했다. 1학년때 성적은 평균 9점대로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조행 평가도 갑(甲)을 받았다.
김영태(金永泰)와 이순근(李純根)은 나란히 동맹휴교에 가담했으며 졸업후 각각 상급학교로 진학해 공무원이 되었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산면장을 지냈다.
최병기(崔秉基)는 아버지가 동맹휴교 당시 주산면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최재홍(崔在洪)으로 개화기 주산을 대표하던 지역유지 5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재홍은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 부안향교의 전교를 역임했고 일제 강점기에 4대 주산면장에 취임해 8년 넘는 기간 동안 근무했으며 그의 다른 아들인 최병철(崔秉哲)도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3년에 잠깐 주산면장을 지냈다.
최병기는 당시 나이가 불과 10살(1916년)로 1917년생인 류광적과 함께 주산보통학교 3학년에서 거의 막내였다.
최병기는 아버지가 면장이었음에도 동맹휴교에 가맹했다는 이유로 23일의 유기정학처분을 받았고 약 일주일 뒤인 7월15일에 해제됐다고 학적부에 기록돼 있다.
전임 면장 신용우(申龍雨)의 아들인 신춘식(申椿植)도 이때 동맹휴교에 가담해 유기정학 처분의 '명예'를 달았다. 1913년생인 신춘식은 주모자였던 김종두와 마찬가지로 조행평가에서 '병(丙)'을 맞았으며 동맹휴교를 벌였던 3학년때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낮게 평가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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