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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너머로 무제한 팽창하는 민주당 '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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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헌법 너머로 무제한 팽창하는 민주당 '당심'

[이관후 칼럼] 국회의장 당원 투표가 반민주적인 까닭

오늘(30일) 공개된 민주당의 당헌당규 개정시안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16. 국회의장단 후보자 및 원내대표 선출에 대한 당원 참여 보장

○ 국회의장단 후보자 및 원내대표 선출 선거에 권리당원 유효투표 결과를 20% 반영, 권리당원 투표는 ARS 투표 또는 온라인 투표로 실시

- (현행) 재적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선출

→ (개정) 재적의원 유효투표 결과를 100분의 80, 권리당원 유효투표 결과를 100분의 20으로 합산하여 과반수 득표로 선출

국회의장단 후보자 선출에 당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 민주당 지도부가 지향하는 '당원권 확대'를 추진하여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을 만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당원의 주인 된 권리'는 과연 민주적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첫째는, 당원의 민주적 권리가 국민의 민주적 권리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권리가 헌정주의 원리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당원의 주권은 국민의 주권 앞에 멈춘다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은 좋은 말이다. 민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민주 정당의 주권이 당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 지도부를 당원이 뽑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은 자의적으로 당을 이끌어서는 안 되며, 그 정당의 역사와 전통, 정체성은 물론 당원들의 바람을 대표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런 것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당을 운영한다면, 당원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당원들이 당 지도부 선출에 상당한 정도로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다.

당원의 주인됨은, 당 대통령후보와 국회의원,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당원이 뽑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들은 그 정당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선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자기 당의 입장과 배치되거나 자기 당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인데 당 지도부의 비호를 받아 공천을 받는다면, 당원들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주인된 권리다.

그런데 당 지도부와 최고위원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다른 부분이 있다. 전자는 당원의 선택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후자는 국민의 선택을 한 번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정치인은 '대표-책임' 관계에 있다. 전자는 당원들에게 또 정당에 책임을 진다. 그런데 후자는 당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선거에서 당선되면 국민의 대표이기도 하다.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 후자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당원과 정당에 책임을 지지만, 최종적으로는 국민과 국가에 책임을 진다. 그래서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탈당을 하거나, 심지어 당적 박탈을 당해도 의원직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국회의원의 대표-책임 관계가 어디에 있느냐는, 우리 헌법에서 명확하다. 당원 민주주의, 곧 당원의 주인 된 권리는 무제한적이지 않다. 그것은 국민의 주인 된 권리 앞에서 멈춘다.

국회의장 선출 권한은 다수당이 아니라 국회에 있다

국회의장 선출은 누구의 권리인가? 우리 헌법과 법률은 국회의장을 국회 다수당이 뽑는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우리 법은 국회의장을 국회 본회의에서 선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 대표이지, 국회 다수당의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은 공천을 받은 각 정당의 후보들이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선출한다. 이 점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당선자들이 뽑는 원내대표와는 천지 차이가 있다. 원내대표의 선출과정은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만약, 다수당에서 누군가를 국회의장으로 뽑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는데, 본회의에서 다른 사람이 갑자기 뽑힌다면 이것은 민주적일까 아닐까? 그것은 충분히 민주적이다. 예를 들어, 추미애 의원이 민주당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뽑혔는데, 본회의에서 당선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은 국회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국회의원들이 당원으로서는 그 사람을 국회의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국회의원으로 생각해보니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정당 내부의 문제이지, 입법부의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물론 민주당에서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해결책이 당내 국회의장 후보 선출과정에 당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한참 나간 이야기다. 우리 법에 따르면 국회의장 선출은 국민들이 선출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권리이자 의무이지, 특정 정당 당원들의 권리가 아니다.

차라리 당원 다수와 반대된 표를 던진 의원을 찾아서 당원권 징계를 하자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찾기 어렵다는 핑계로 헌법에 명시된 헌법기관의 자율성을 당헌당규로 침해하자고 하면 이게 말이 되겠는가. 이 사안으로 국회의원에게 당원으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을 묻거나 권한을 침해할 수는 없다.

헌법이 정당정치를 보장하는 나라에서 당원의 권리가 신장되는 것과 정당의 민주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의 권리나 입법부 전체의 민주주의와 충돌할 때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를 비롯한 22대 국회의원들이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중앙홀 계단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실천하는 개혁국회, 행동하는 민주당"이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의장 당파성의 제도적 강화는 헌정원리에 도전한다

국회의장 후보를 한 정당에서 내부적으로 선출하는 것은 관례이지 법적 절차가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니 다수당에서 뽑힐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이라는 민주주의 틀 내에 있다. 관례를 실질로 강제하려면 법을 개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국회의장은 본회의에서 선출하되, 각 정당은 사전에 후보를 결정할 수 있다'라는 법조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법을 개정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헌법은 3권 분립의 요소를 원리로 하고 있고, 그에 따르면 한국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은 비교적 엄격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요컨대 유럽의 수상들처럼 의회제에서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이익을 주로 대변하는 것과도 다르고, 미국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처럼 선거에 직접 개입하거나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과 '공천개입 금지', 국회의장의 '당적 이탈'은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헌정 원리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법개정이 허용·유도하는 것은, 중립적 의무가 있는 국회의장을 전체 국민들의 뜻이 아닌 특정 정당이나 그 정당의 다수파가 뽑도록 하자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국회의장은 국민의 다수가 아닌 1/4정도의 지지를 받는 당파적인 지도자가 되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 법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관례를, 그렇게 되도록 하는 강제성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법이다.

그렇다면 이 법의 취지는 우리 헌정 원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각 정당이 사전에 후보자를 정한다는 것은 그 법이 없을 때에 비해서는 분명히 국회의장의 당파성을 법률로 강화시키는 조항이다. 게다가 그 선출과정을 규정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열어 두었으니, 당파성이 어떻게 강화되는지에 대해 각 정당의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매우 높다. 이번의 경우처럼 당원들이 직접 국회의장 후보의 선출에 참여하자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헌정 질서에서 가능한 일일까?

이것은 위헌 여부에 대한 논의를 거쳐봐야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이 경우에도,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만이 의장단의 사전 선출에 참여하는지, 국민의 대표가 아닌 사람들 다수가 참여하는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당원권 강화가 곧 정당 민주주의는 아니다

당원이 투표로 결정하면 그것은 '당심'인가? 한발 더 나아가, 당심은 옳은가? 그렇지 않고, 그럴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것이 민주주의인 이상 그렇다.

당원 투표는 만장일치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니 당심이란 늘 다수결일 것이다. 실제로 최근 한 유튜브 방송을 보니, 당심이란 특정한 시기에 확인되는 '당원들 다수의 뜻'이라고 대부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다수결은 변화하는 여론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지, 그것 자체가 항상적인 여론은 아니다. 다수결에는 늘 다수가 있고 소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당의 다수는 누구를 지지하고, 당의 소수는 누구를 지지할 뿐이다. 찬성한 의견도 반대한 의견도 당심이다.

'다수의 뜻'이 '모두의 뜻'이 되려면 마술이 필요하다. 루소는 그것을 '일반의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일반의지는 지금 이야기되는 당심과는 사실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일반의지는 결과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지, 누군가가 그것을 일시적 여론조사를 통해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심'을 생각해보면 안다. 한때 민심은 박근혜였고, 탄핵이었고, 문재인이었고, 윤석열이었다. 세상에 단일하고 변하지 않는 민심이란 없다. 그 민심이 항상 옳을 리도 없다. 하물며 당심인 바에야.

백보 양보해서, 그런 당심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당의 모든 사람, 특히 선거를 통해 당원 이외의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도 항상적으로 당원 다수의 뜻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해보면 어떤가? 이것은 민주주의인가?

그게 민주주의라면 이렇게 하자. 이 당에는 선출직 지도부가 필요없다. 당원들 중에서 무작위로 혹은 원하는 사람들을 중에서 추첨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자. 또한 상시적으로 당무를 당원투표에 부치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 당에서는 항상적으로 당심이 작동할 것이다. 이렇게 쉬운 당원 민주주의가 있는데, 왜 어렵게 당 지도부를 뽑는가?

당 지도부 선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왜 가끔 이렇게 다수 당원의 뜻, 곧 당심에 어긋나는 최고위원이 한두 명씩 뽑히는가? 이것도 문제다. 여러 후보를 놓고 뽑는 이상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후보자들에 대해 각각 한 사람씩 찬반을 묻는 투표를 하자. 그렇게 하면 다수 당원의 뜻에 어긋나는 후보는 아예 최고위원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당심이 반영되는 길이다. 자, 이렇게 말하면 어떤가. 이것은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는 다수의 통치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는 다수의 통치 말고도 표현의 자유, 토론과 숙고, 다양성의 보장, 다른 시민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당원들이 간헐적인 투표 참여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동원용 장치에 불과하다. 이것은 잘해야 일부 당원권의 강화이기는 하지만,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지금 민주당에 더 민주적인 정당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양한 당원들의 의견이 오가는 공론장의 의견이 아니라 다수 당원의 뜻으로 당심을 확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내 토론과 존중의 문화를 만드는 것인가? 답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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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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