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미국, 언론자유 자랑하며 어산지 가두는 건 위선"

정부 기밀 문건을 폭로하는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줄리안 어산지가 영국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가 그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영국 고등법원은 인도 결정을 연기했다. 이와 관련 영국 내에서는 어산지의 완전한 석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6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어산지가 영국 정부의 미국 인도 결정에 대해 제기한 소송과 관련, 영국 고등법원이 연기 판결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법원은 어산지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미국 측의 소명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체적으로 법원은 다음 기일인 5월 20일까지 어산지가 미국 시민과 동일하게 미국 헌법상의 권리인 언론의 자유를 가지는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 측에 명확히 밝히라고 주문했다. 이는 호주 국적인 어산지가 미국에서 재판을 받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고등법원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신문의 로스앤젤레스 특파원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던컨 캠벨은 이날 신문의 '오피니언'에 "영국 판사들이 줄리언 어산지의 항소를 허용한 것은 옳은 일"이라며 "미국이 언론 자유 보장을 자랑하면서 어산지를 가두는 것은 위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줄리언 어산지에게 시간이 주어졌다. 이 잠시 동안의 시간은 그가 미국에 구금당하려는 것에 맞서 싸워왔던 오랜 기간 중 작은 승리로 기록됐다"며 "그런데 이 일련의 사건에서 가장 고약한 지점은 그가 (5월에 있을 법원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공간이 아무런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 간 수감됐던, 경비가 삼엄한 교도소라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캠벨 전 특파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미국이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확약'을 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산지에게) 사형이 부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며 "놀랍게도 이는 이전에 그들(어산지 측)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돼 1년이 넘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소속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의 석방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산지를 미국 법정에 세우고 교도소에 수감시키려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지적했다.

캠벨 전 특파원은 "지난 1년 간 러시아에 수감된 에반 게르시코비치의 석방을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산지 인도와 구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자랑하는 것도 미국의 위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 미국이 어산지와 의견 차이가 있었던 미국 및 영국 언론인들을 설득해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내놓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어산지에 대한 사건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분명해졌다"며 미국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캠벨 전 특파원은 어산지의 변호인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미국) 검찰은 명백하고 중요한 공공 이익이 있는 기밀정보를 획득하고 출판하는 언론 관행을 '범죄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면서 "어산지의 무조건적인 석방만이 영국과 미국 모두 '언론의 자유'를 단지 알맹이 없이 장황한 말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일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 법무부와 어산지 측이 형량을 조정하는 협상을 해왔다고 보도한 것과 관련, 캠벨 전 특파원은 "어산지의 변호인은 그러한 협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를 인용해 지난 수 개월 간 양측이 일부 혐의에 대한 유죄를 인정하 형량을 조정받는 이른바 '플리 길티'(plead guilty)에 대한 논의를 해왔다고 보도한 바 있다.

신문은 어산지가 기밀 문서 취급에 대한 유죄를 인정할 경우 다른 혐의들을 기각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돼 왔으며, 실제 승인될 경우 어산지가 영국에서 구금됐던 5년의 기간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산지는 지난 2006년 위키리크스를 설립해 주로 정부 기밀을 폭로해왔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어산지에 대해 "전쟁, 간첩 행위, 부정부패와 관련된 수많은 기밀 및 공식 보고서를 포함한 문서 1000만 건 이상을 폭로했다고 주장한다"며 "2010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민간인 18명이 사살당하는 장면이 담긴 미군 헬기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방송은 "또한 위키리크스는 육군 정보 분석병이었던 첼시 매닝이 제공한 기밀문서 수천 건도 공개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미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하고도 보고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며 그간 활동을 소개했다.

기밀 문서를 폭로하며 미국에 쫓기는 상황이 된 어산지는 주영국 에콰도르 대사관에 의탁해왔다. 그러다 에콰도르 정권이 교체되면서 대사관에서 쫓겨났고 이후 2019년 4월 영국에 체포돼 현재까지 벨마시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