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암울했던 1980년대 대학교 4학년 1학기가 끝나기 전에 학창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마침 발생한 1985년 '구로공단 연대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구속을 각오하고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을 한 후 어머니께서 눈치채지 않으시게 작별인사를 드려야 했다.
조심스레 어머니의 옆모습을 힐끗 보면서 '며칠간 어디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별다른 말씀 없이 '그래라'고 하셨다. 딴 때 같으면 어디 가는지 물어보셨을 텐데….
집에서 나와 다시 한 번 집 쪽을 돌아보았다. 초여름의 기나긴 해가 아파트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오후에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발걸음이 어지러웠다.
그는 1986년 2월 '대우어패럴 사건' 항소이유서에 이렇게 썼다.
"오늘은 졸업식 날이다. 나는 이 순간 대학 4년의 학문적 성과로서 제출해야 할 졸업논문 대신 한 자루 볼펜으로 하얀 여백을 열심히 채워갔다. 나의 진실이 모두 실려질 수 있기를 바라며 까만 학사복 대신 파란 수의를, 가슴엔 카네이션 꽃 대신 네모진 헝겊 위에 '3'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는 수번을 달고 있다. 나는 답해야 한다. 날이 새기도 전에 길을 떠나려는 아들을 걱정하던 나의 어머님께 그 새벽이 멀지 않아 열릴 것을 확신하며 이 글로써 변명을 대신한다."
어머니는 매일 면회를 오셨다. 서울 잠실에 사셨으니 개봉역까지 두 번 전철을 갈아타고 10여분 걸어 2시간 남짓 걸려 영등포교도소로 면회를 오셨다.
하루에 1번 감방에서 나와 자유로운 공기를 맞이하게 하려고 매일의 고행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셨다.
면회가 허용된 시간은 단 5분. 어머니는 '밥 잘 먹었니', '운동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어라' 말씀하셨다.
가끔 바깥 소식도 알려주셨다. 면회실에는 교도관이 동석하여 모든 대화 내용을 기록하면서 시사적인 내용은 말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가끔 쪽지에 궁금할 만한 사항을 적어와서 유리창 너머로 살짝 보여주셨다.
일제시대 때 지금의 초등학교인 '소학교'를 다녀서 일본말만 배우고 한글이 서툴어 바깥 소식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해 하셨다.
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전북 '전주시병' 경선에서 정동영 예비후보에게 져 탈락한 김성주 현역의원의 사모곡(思母曲)이 지역 정치권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자신의 SNS에 올린 이 글은 단시간에 수백여 명이 읽었고, 댓글을 100개 가까이 남기기도 했다.
재선의 김성주 의원은 18일 "평생을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제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하고 많은 일을 했지만 한 일이 없다고 한다"며 "그러나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성주 의원은 지역발전에 대한 강한 애정을 피력했다.
"전북특자도 출범은 전북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혁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전주와 완주가 하나 되고 새만금과 군산-부안-김제로 커지는 것은 전북 발전의 필수조건입니다. 아울러 전북을 하나의 단일 광역교통망으로 구축하는 것도 전북특자도 성공의 전제 조건이 이어야 합니다."
김성주 의원은 "다시 국회에 들어가서 충분한 노후소득보장,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보장 등 모두가 누리는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제대로 열고 싶었다"며 "연금개혁과 의료개혁, 전국민 주거보장 등은 꼭 이루고 싶은 과제였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성주 의원은 "의로운 싸움을 벌인다고 했는데 '외로운' 싸움이 되어버렸다"며 "절망이 깃든 곳에서 희망은 항상 새롭게 피어난다. 멈춘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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