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가운데, 여야 지도부는 모두 말을 아끼고 있다.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가 문재인 정부 시기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수사팀장 체제로 진행돼 여야 주요 정치인이 모두 얽혀있다는 사정 때문으로 보인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9일 국민의힘 중앙당사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에 "그 사건은 대법원의 사실상 수사 의뢰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중간 진행 상황에 대해 수사에 관여했던 사람이 직을 떠난 상황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고 즉답을 피하며 "나중에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것"이라고만 했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도 이날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같은 질문에 "한 위원장도 결과와 평가를 보자고 했지 않나. 그런 입장"이라며 "2심, 최종심이 있을테니 지켜보겠다. 1심 판결에서는 사법부 입장을 존중한다"고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앞서 정광재 국민의힘 대변인이 지난 27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양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문재인 정부의 무리한 사법부 장악에 대한 사법부의 정당한 판결이었다"며 대야 공세를 취하는가 싶었지만, 당 지도부 인사들이 이에 동참하지는 않은 것이다.
야당 입장도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이 "당시 50여 명의 검사를 투입하고 5개월 간 수사를 지휘하고 담당했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이 순서"라고 같은 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말한 것이 전부다.
다만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을 세상에 알린 민주당 이탄희 의원과 정의당은 사건에 대한 1심 법원의 판결을 정면 비판했다.
이 의원은 이날 문화방송(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말 비상식적인 판결이다. 그럼 이 모든 일은 귀신이 시킨 것인가"라며 "재판 개입이 있었다. 법원행정처가 재판 개입하고 판사 뒷조사했다는 건 이번 판결에서 인정됐다. 없었던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판결 내용은 양승태 대법원장은 몰랐다는 것"이라고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했다.
그는 이어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이라며 "이 비서조직에서 양 대법원장 수족 역할을 했던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있다. 이분이 건배사가 굉장히 유명하다. KKSS라고 해서 '까라면 까고 시키는 대로 해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사람이 일을 주도했는데 양 대법원장이 모르겠다.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또 "일부 사건에 대해서는 양 대법원장이 관여가 됐더라도 법리적으로 직권, 권한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죄"로 판결했다며 "그 부분도 상식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에게는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직권 자체가 없으므로, 양 전 대법원장이 다른 판사에게 재판 관련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직권을 남용할 수 없다고 본 1심 법원의 판단을 비판한 것이다.
이 의원은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위를 남용한 것이다. 재판 개입을 하면 판사들이 왜 거기에 굴복을 하겠나. 대법원장이 최고 권력자이지 않나"라며 "그러니까 그 지위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이지 형식적으로 대법원장이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따져 영향을 받고 안 받고 이러지 않지 않나"라고 부연했다.
김준우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26일 페이스북에서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며 "양승태 사법부가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수차례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검찰 또한 사법농단의 정황을 발견했다며 수년에 걸쳐 수사를 진행했음에도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는 "법원의 판결과는 별개로 의문스러운 정황 속에서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주며 노동자, 서민, 우리의 역사들 앞에 부끄러운 판결을 이어나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좋게 바라볼 수 없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무죄 선고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2심에서는 반드시 1심 법원의 판단이 바로잡히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도 이날 성명에서 "사법부의 독립성을 중대하게 훼손한 법관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졌다"며 "사법부 내 권력 남용에 대해 사법행정권자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법원이 스스로 사법의 독립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1심 법원이 양 대법원장 등에게 직권남용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서는 "대법원은 수사·감사를 지시하거나 관여한 고위 공무원에게 일반적 직무 권한을 인정해 왔다"며 "그럼에도 고위 법관들에게만 일반적 직무 권한을 인정하지 않은 해석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1부(이종민 임정택 민소영 부장판사)는 재판 개입,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헌법재판소 견제, 비자금 조성 등 47개 범죄 혐의를 받고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몇몇 주요 혐의에 대한 판결을 보면, '재판 개입' 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재판에 개입할 일반적 직무 권한이 없어 직권남용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관 블랙리스트'로 불린 '물의야기 법관' 보고서 작성 지시에 대해서는 일반적 직무 권한이 인정되지만 직권을 남용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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