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을 처음 접했을 때 인물들의 생김새가 이전 디즈니 작품과는 전혀 다른 것에 위화감을 느낀 아시아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벨', <인어공주의>의 주인공 '에리얼'과는 달리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뮬란>의 주인공 '뮬란'은 가늘고 긴 눈에 다소 평평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실제 인물 생김의 특징을 잡아 다소 간소하게 표현되는 애니메이션 인물 묘사에서 굳이 이전의 서양 배경 인물들과 아시아 배경 인물 묘사에 차이를 둬 서구의 관점에서 본 '전형적인 아시아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저자 실키는 만화 에세이 <김치바게트>(실키 지음·현암사 펴냄)에서 "찢어진 눈, 들창코, 노란 피부" 등으로 서양에서 오래 전부터 아시아인들이 "우스꽝스럽게 표현"돼 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 최근에 이르러서도 '수학을 잘 하고 신중하고 소심하며 어설픈 발음을 구사하는' 아시아인에 대한 "클리셰"는 여전하다며 아시아인도 "그냥, 사람처럼" 그리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대로 프랑스인을 "거대한 코, 튀어나온 눈, 와인 중독, 영어 능력 빵점"으로 일반화 해 그림으로 표현하면 어떤 느낌일지 제시하기도 한다. 해당 작품에서 등장하는 저자와 함께 생활하는 프랑스인은 저자가 제시한 프랑스인 묘사에 대해 "좀 너무하다", "이러다 잘린다"라고 말하며 이를 결코 "농담"으로 웃어 넘기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7년간 생활한 저자는 프랑스 독자들을 대상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저자는 책 말미에 이 작품은 프랑스 만화 출판사 다르고의 웹매거진 <마탕!>에서 연재됐고 프랑스인들이 평범하게 읽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다소 "삼삼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품을 기획한 2021년 당시 "프랑스에서 팬데믹 기간을 보내고 있는 동양인"이었다는 점을 알리며 "만화의 톤은 당시 제가 느낀 감정에 비하면 하나도 맵지 않"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삼삼"하다고 표현했지만 책에 담긴 차별 관련 내용들은 날카롭다. 특히 노골적인 아시아인 비하와 차별이 아닌 칭찬이나 관심의 탈을 쓴 차별 행위를 "먼지 차별"이라고 일컫는 대목에 눈이 쏠린다. 그는 "먼지 차별"은 "일상 속에서 미세하고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의도했든 아니든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편견 어린 말과 행동"으로 때문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아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보다는 속에 담긴 의미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예를 들어 "진짜 출신"이나 "모국어"를 묻는 질문은 관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상대방이 "프랑스인일 리가 없다"는 전제 아래 이뤄지는 질문이며 "아시아인이라 수학을 잘한다", "너희들은 엄청 엄청 어려 보인다"는 말 등은 칭찬처럼 보이지만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반복하는 발언이라고 지적한다. "계속 프랑스어로 말하는데 영어로만 대답"하거나 "내가 들어서자 갑자기 마스크를 끼는 사람" 등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차별이 미묘할 때도 있고 심지어 "너를 유색인종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에 의해 유색인종으로서의 경험이나 인종차별의 존재를 부정당하기도 한다.
저자는 "먼지 차별"은 "간접적이기에 항의하기도 쉽지 않다"며 대응했을 때 "너무 예민하다", "과민 반응"이라는 식으로 문제 제기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대답이 돌아오기 쉽다고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차별 행위를 하는 이들을 향해 "변명하기보다 사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면" 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아시아인 여성'의 경우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동시에 경험한다. 저자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희롱은 인종차별도 늘 달고 다닌다"며 대화 중간에 "비자 필요하지? 결혼해 줄까?" 하는 식으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서구에서 아시아 여성이 "친절하고 아담하고 순종적"이라는 형태로 과잉성애화 돼 있다고 지적하며 성애화되거나 페티시화된 형태로 영화 등에 등장하고 포르노 사이트엔 '아시아'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설명한다. 아시아 여성들에게 과도하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을 칭하는 용어(옐로우 피버)까지 있다. 저자는 이런 남자와 데이트 한 적이 있는데 "그의 아시아 컬렉션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고 묘사했다.
"삼삼"한 만화의 분위기는 코로나19 대유행 당시를 그린 '펜데믹'이라는 작품에서 잠시 바뀐다. 격리가 시행되거나 외출 자제를 요청 받던 당시 상황을 그린 듯 시종일관 격자무늬 배경에 침대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만이 그러져 장면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 "삼삼"하지만 내용엔 당시 코로나19가 중국발 바이러스라며 아시아인을 혐오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드러나 있다. 저자는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사람들"이라며 "밖에서 사람들이 피하고 인턴도 거절당하고 친구는 길에서 살해 협박도 받았다"고 전한다. 그는 "이 사회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연재된 이 작품에서 인종차별을 저지하고 사회적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연대"를 제안한다. 연대의 방법으로는 기사, 책,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차별의 다양한 형태를 찾아 보고 부정적 경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믿어주기, 차별 발언이 들리는 순간 침묵하지 않고 "그런 말을 왜 해", "뭐가 웃겨", "부당하네" 라는 식으로 곧바로 대응하기 등을 제시했다. 또 백인, 남성성 등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지하고 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는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기를 당부했다. 저자는 프랑스인들에게 차별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네가 그들(차별 및 혐오 행위자들)과 다르다는 걸 어떻게 알겠니?"라고 강조한다.
책엔 인사 방법부터 아침 식사, 날씨, 각종 제도 등 한국과 프랑스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도 담겼다. 책의 제목 '김치바게트'는 각국을 대표하는 음식의 조합이기도 하지만 젓가락과 빵이 프랑스에서 동음이의어라는 데서 나온 '소통 오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작품 중 하나에 젓가락을 준비해달라는 저자의 말에 프랑스인이 바게트를 준비한 에피소드로 재미있게 표현돼 있다. 낯선 사람과의 얼굴을 맞대는 인사 방식(비주)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는 저자는 에어컨이 거의 없는 상황에 대해선 부채를 만들어 적응을 시도한다. 유급 휴가가 30일에 사용을 '당연한 권리'로 보는 프랑스와 휴가 사용에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을 비교하기도 한다. 다만 저자는 어느 쪽에서 사는 삶이 '더 낫다'고 제시하진 않는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힘든 일을 겪지만 "엄청 흥미롭네"라고 넘기려 한다며 "사는 건 다 똑같다"고 "천국은 없다"고 말한다.
각 에피소드에서 두 나라의 차이와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는 가운데 한 가지, 처음과 인식이 달라진 차이가 눈에 띈다. '속도'다. "느려터진 프랑스 같으니!" 하고 화를 내곤 했던 프랑스의 관청과 기업에서의 서비스 처리 속도에 대한 생각이 너무 빨리 변하는 한국에 방문한 이후 좀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권 재발급 신청과 세무서에서 서류 받는 일정이 각 불과 10분 만에 끝난 것은 경이로웠지만 영화관, 카페, 식당 등에서 키오스크로만 주문해야 하는 건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휴대폰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 뒤엔 '인공지능(AI) 상담원'과 한참을 씨름해야 했다. 저자는 "한국은 너무 빨라서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지난해 프랑스에선 경찰이 알제리계 청소년을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시위가 일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사건 원인을 구조적 인종차별이 아닌 개별 경찰의 일탈이라고 주장했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와 프랑스 사회가 차별에 대한 인정조차 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책이 프랑스의 '먼지 차별'에 경종을 울렸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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