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냉전'을 버렸는가?
지난 늦가을, 국제정치 무대를 마치 초원의 사자처럼 누비던 당대 최고의 미국 외교관이 세상을 떠났다. 바로 헨리 키신저다. 그는 미중화해로 G2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향년 100세. 그의 미중화해가 한국에 미친 충격은 엄청났다. 6.25의 애치슨라인과 비교될 정도다. 전쟁 시기 신생 한국을 놀라게 한 인물이 애치슨이었다면, 화해로 반공 한국을 경악케 한 키신저의 충격은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다.
'반공 쿠데타'와 '반공 근대화'로 성공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중화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닉슨이 권하는 남북화해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리고 영구집권을 손에 쥐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10.26정변과 12.12쿠데타가 터졌다. 요즘 주목받는 영화, <서울의 봄>도 이런 미중화해의 맥락에 들어있다. 이어진 광주학살 직후, 미국의 지지를 받은 신군부는 '반공'을 '친공'으로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계전략 기준은 어떻게 옮겨간 것일까? 이 글은 키신저의 활동을 중심에 놓고, 냉전과 화해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오늘의 우리 한국 상황을 들여다보면서 쓴 것이다.
'한반도 밀약'
미중화해를 넉 달 앞두고 베이징으로 날아간 키신저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한반도 밀약에 합의했다(1971.10). 그들에게 한국과 한반도는 미중화해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이 찾은 분단 한반도의 타협점은 '현상유지(state quo)' 밀약이었다. 30년 후에 밝혀진 이 밀약을 당시 한국정부는 까맣게 몰랐다.
저우언라이 :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언젠가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서 철수할 때 미국은 일본 자위대 군사력이 한반도 남쪽에 진입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셨죠?
키신저 : 맞습니다.
저우언라이 : 두 번째, 미국은 결국 한국에서 철수할 것이며, 그 이전에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쪽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셨죠?
키신저 : 정확하게 합시다. 공개되지 않은 비밀인데, 우리의 현재 계획은 내년(1972년)에 주한미군의 상당 부분을 철수시킨다는 것입니다....우리는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우언라이 : 세 번째로 미국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법적지위를 인정하겠다고 하셨죠?
키신저 : 그건 복잡한 얘긴데….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밀약의 초점은, 적대적 분단 상태에 있는 한반도의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남북화해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박정희 정부를 감안한 것이다. 밀약의 전제는 ‘한반도의 안정과 전쟁 위험 감소, 그리고 러시아, 일본 등 다른 세력의 한반도 개입 방지’였다. 요지는, 미국이 주한 미군의 상당 부분을 철수하고, 일본 자위대의 한국 진입을 방지하며, 한국군이 휴전선을 넘지 않도록 하고, 북한의 법적 지위 인정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미중 양국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18년 만에 다시 만나 이 이 밀약을 맺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미중 양국이 그들의 역사적 화해를 앞두고 한반도 분단을 ‘뜨거운 감자’로 밀어두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뜨거운 감자’ 전략은 북핵과 미사일 문제가 불거진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분위기다. 트럼프의 ‘하노이 쇼’와 바이든의 ‘철벽 봉쇄’를 거치면서 그만큼 한반도 변화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지만, 역시 그들의 ‘뜨거운 감자’ 전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문제가 우선이다. 우리의 미래를 놓고 누구를 기댈 것인가?
박정희와 키신저의 만남
미중이 한반도 밀약에 합의한 지 2년 후, 박정희가 서울에 온 키신저를 만났다. 냉전을 화해체제로 바꾸어나가는 키신저와, 반공 기득권에 묶여있는 박정희는 서로 전혀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 미중화해는 복병인 셈이었다. 35만 명의 월남 파병과, 케네디 정부가 내려준 ‘반공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권좌는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키신저가 서울을 방문한 시기는, 김대중 납치사건 석 달이 지나고,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이 지나는 때였다(1973.11.16). 중동전쟁 중재를 추진 중인 미 국무장관은, 중국에 인접한 ‘분단 개도국’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4차 중동전쟁의 교훈은, 북한의 도발에 맞서 (남한이) 반격할 경우 국제정치 환경은 원산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겠지만, 평양까지 얻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키신저는, 중국과의 밀약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준비 중이었다(1971.10). 서울에 들르기 전 키신저는 먼저 베이징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의심쩍은 행동들을 비난하면서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기적적으로 국민당과 미국을 몰아낸 마오는, 다시는 ‘내정 간섭이 없는’ 중국을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키신저는, 주한 미군 철수를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만난 지 두 달 후, 미 국무부 내부회의에서 키신저 이렇게 말했다(1974.1.28).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투자할 가치는 없다고 본다.' 이 시기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한 지 20일 후였다(1974.1.8). 간접 화법을 즐겨 사용하는 키신저의 속내는 싸늘했다. 그는 주한미국대사 하비브에게 물었다. ‘가령 주한미군 4만2천 명 중 2년 안에 2만 명을 감축할 경우 한국 국내 정치에 대한 개입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답은 '예스'였다. 그의 서울 방문이 미군 철수에 필요한 현장 체크 차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무너진 '반공', 그리운 '반공'
미중화해의 싸늘한 공기가 처음 박정희 정부에 불어 닥친 것은 1969년 12월, 광화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였다.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포터는 안기부장 김형욱을 불러내 남북화해를 권했다(미국과 약소국의 격차였다). 사실상 닉슨정부가 미중화해를 예고한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펄쩍 뛰며 즉각 김형욱을 이후락으로 교체하며 영구 집권 프로그램을 방어할 대응 태세에 들어갔다. 이때 김형욱은 배신감을 느꼈다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내부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남북화해 기회는 이렇게 해서 날아가 버렸다.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끈질기게 권하는 남북화해를 발로 찬 다음, 7년의 고통스런 터널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손에 쥔 것 같았던 영구 집권체제는 배신의 술자리 ‘10.26정변’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정변을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국제정치에 무지한 청와대 돌대가리 참모들이 대통령을 죽였다.’(그해는 미중수교가 선언된 해였다). 뉴욕타임스의 시각은 오로지 김재규 총격으로 도배질한 한국 언론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어서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오는 전두환의 '12.12쿠데타'가 발발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는 '아버지' 박정희의 반공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희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집권한 전두환은 중국에 신호를 보냈다. 국내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중공 민항기 승객 100여 명을 고급호텔과 선물로 극진하게 환대했고(1983.5.5), 노태우는 '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소련, 중국과 수교하고 북한과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공산국가' 중국은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1986)과 서울올림픽(1988)에 참가했다.
'체로키'팀과 신군부
여기서 중요한 의문 하나! 박정희의 철통같은 '반공' 기조가 어떻게 신군부의 갑작스런 ‘친공’으로 전환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 배경에 냉전체제를 화해체제로 전환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이 작용했던 것인가?
당시를 돌아보자. 거기에 미국정부가 만든 ‘체로키’라는 이름의 비상대책팀이 나온다. 미 정부는 10.26정변 이후 이어지는 급박한 사태를 주시하며,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 이 ‘체로키’팀을 가동했다. 그때로부터 37년 후, JTBC 손석희 앵커가 이 ‘체로키’팀을 ‘앵커브리핑’에서 소개했다.
미국시각 1980년 5월 22일 오후 4시 미 백악관 상황실. 광주에서 첫 집단 발포가 벌어진 직후에 미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는 철저히 미국의 안보 논리에 의해서 진행됐고, 미국은 그 직전에 있었던 신군부의 발포행위를 받아들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민군에 대한 사형선고' 라고 표현했습니다(한신대 이해영 교수). 광주 시민의 생사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회의에 걸린 시간은 불과 75분... 광주 시민들은 하루만 더 버티면 미국이 도우러 올 것이라고 믿었으니…비극적 결말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자막; 헤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은 ‘전두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했다./ 자막; ‘공수여단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나 생명이 위험한 경우 발포하도록 권한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덧붙이는 이야기!(배경 음악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나간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이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 주인이었던 체로키 인디언들이 불러왔던 노래(장송곡)입니다. 코드명 "체로키"... 그들은 대한민국의 광주를 이야기하면서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자신들이 (인류 역사상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극악하게) 학살한 인디언 부족, 체로키의 이름을 코드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의 신임을 받은 신군부는 '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 박정희의 '반공'에 등을 돌렸다. '반공'을 간판으로 건국한 대한민국에서 '반공'을 떼어내는 일은 이렇게 감행되었다. 그리고 20여년이 흐른 지금, 윤석열 현 정부는 그들만의 셈법을 쫓아 다시 ‘반공, 멸공’을 그리워한다.
'중국의 발전은 운명이다'
서방에서 중국의 부상에 박수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서방은 중국에 대하여 ‘언젠가는 폭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에게 누군가가 ‘중국의 발전은 운명이다!’라고 말한다면 몹시 황당할 것이다. ‘닥치고 혐중’에 빠진 우리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찍이 ‘중국의 발전은 운명이다!’라고 외친 인물이 있다. 바로 헨리 키신저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견제'로 미국의 국익과 국가 경쟁력에 손상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시아의 거대 국가인 중국의 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견제보다 협력하는 것’이 미국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그의 시각은, 중국을 보통국가가 아닌 하나의 응집된 문명으로 본다(키신저, ‘On China’). '문혁 시기에도 중국의 과학기술은 중단된 적이 없다'거나 '중국을 하청국가로 대하지 말라'는 말도 키신저가 한 것이다. 마치 '모르면 닥치고...!'라는 느낌이 들만큼, 그의 안목은 독특하고, 서방의 '반중국' 부화뇌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미중 협력을 글로벌 외교의 중심축에 놓고, 지난 50여 년 동안 세계 외교가에서 '살아있는 전설', 최고의 '중국통'으로 통했다.
중국의 부상이라는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견제 말고 협력’이라는 그의 조언은 오늘날 미중관계의 현실을 움직이는 거대한 축으로 살아 움직인다(그들의 협력을 보면, 우리 한국의 ‘혐중’ 회오리는 ‘위험한 장난’이다). 격렬한 미중 갈등 속에서도 양국이 천문학적인 경제협력으로 뒤엉켜 있는 사실을 놓친다면 위험한 바보다. 곧 미중전쟁이 터질 것처럼, 그리고 중국이 곧 망할 것처럼 시끄럽지만, 키신저에게 이런 소문들은 귀찮은 쓰레기였다.
서방의 누구도 그의 통찰력을 흉내 내지 못했다. 그는 지난 60여 년간, 케네디 대통령 이후 12명의 미 대통령을 자문한 학자 출신 외교관이다.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지칠 줄 모르는 실천력을 보면, 왜 미국이 백년 세계제국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밋빛 전망의 조건
여기서 우리는 냉전구조가 뒤엎어지는 키신저의 화해시대를 되돌아봤다. 그 희한한 격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 한국은, 그로부터 근 20년 동안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간신히 군인정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이 건국을 주도한 냉전국가로 출발한 나라다. 그동안 냉전체제가 기른 기득권 세력은 이제 포도넝쿨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그런데 미중화해가 출현하여 새로운 양극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사회가 이런 글로벌 대변화를 인식하거나 수용할 토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공이 곧 생존이었다. 거대한 글로벌 변혁에 부합하는 체제 조율은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과제가 아니다. 아직도 반공에 매달리는 경직성이 건재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냉전은 그리워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냉전 기득권도 시드는 추세다. 이제 일극 냉전시대는 떠나가고, 미중 양극의 경쟁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세상은 변한다. 바이든과 시진핑은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충돌이 아니고 경쟁’한다고 수없이 합창한다. 경쟁에는 협력과 대립이 공존한다. 다윈 같은 진화론자들은 ‘협력성 경쟁’으로 생물의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가?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미 국방장관 로이드 오스티도 ‘한국에 미중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국익 우선주의자인 키신저는, ‘하나는 친구, 또 하나는 적’이라는 이분법을 버려야 할 구시대 유물로 본다. 사석에서 만난 중국의 고위관료들도 ‘친미, 반미는 전략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념을 버리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경은 이제 시작단계다. 장차 더욱 험난해질 건 명확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 한국이 그들 양대 시장을 중시하고 활용하는 일이 힘들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수많은 서방의 싱크탱크들과 전문가들은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한결같이 장밋빛으로 점친다(저출산 제외). 엊그제도 영국 경제경영연구소가 그런 밝은 전망을 내놨다. 헌팅턴도 시사한 바처럼, 우리 한국은 미중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있는 문화적, 경제적 십자로다. 그들이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동아시아 항해에 필요한 나침판을 조정하기 위해서다.
실제, 미중 갈등이 고조 상태인 최근 2년을 제외하면(이 2년의 좌절을 잘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발전해온 나라에 속한다. 거기에 미중 양대 시장을 향한 우리의 전력 질주가 있다. 한미동맹을 외치는 동시에, 중국시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서방 싱크탱크들은 장밋빛 한국의 미래를 놓고,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전제를 제시한다(골드만삭스, WB, IMF, ADB 등). 먼저, 조건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협력이든, 통일이든, 순조로운 남북한 관계가 한국 발전에 핵심이라고 말한다. 남북 분단은 아킬레스건이다. 더 이상 ‘반공’이 정치 카드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도, 10여 년 전부터 그들은 내다보고 있다. ‘독일식 흡수 방식’이 아닌, ‘홍콩식 대화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골드만삭스). 최근 중국 외교부는, 북미관계의 본질은 외교 문제라는 것과, 북한문제의 열쇠는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반공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와 대립점이기도 하다.
다음은 중국시장 활용이다. 걸림돌은 많다. 기술발전과 ‘혐중’정리, 그리고 외교적 노력 등이다. 신뢰가 없는 시장은 의미가 없다. 최근 우리는 수출 1위 상대국인 중국시장이 위축되자 국내 경기가 식는 현실을 체감 중이다. 중국을 벗어나 ‘시장 다변화’를 주장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현실적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사기를 친 것인가?
이처럼, 남북한 관계와 중국시장, 두 가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들 과제 못지않게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한미관계다. 세계제국 미국을 통하지 않은 북한, 중국 정책이 가능하겠는가?
헨리 키신저도, 폴 케네디도, 존 나이스 비트도, 또 다른 미국의 석학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 외교가 적극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외교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중국시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이 조언하는 속뜻은 무엇일까? 백년제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백년제국과 신흥대국을 동시에 설득하라는 것이다. 단순한 반공 외교는 초라할 뿐이다.
지금은 결코 냉전시대가 아니다. 그들의 협력과 교류, 그중에서도 떠들썩한 반도체 전쟁을 보자.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중국시장 접근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미국 반도체협회는 ‘반중국’을 외치는 백악관 앞에서 주장한다. ‘중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30% 이상인데, 우리는 손가락 빨고 있으란 말이냐?’ 앤비디아와 인텔, 마이크론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이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백악관에서 중국과 곧 충돌할 것처럼 불어대는 미국 대외전략의 전통 수법인 ‘미치광이 전략’ 뒤에는 중국 투자에 열을 올리는 월 스트리트가 있음을 잊으면 곤란하다. 미국은 언제나 안전한 꽃놀이패를 추구하는 영리한 나라다. 그것이 미국의 ‘양면전략’이다(한광수 블로그).
이런 미국의 유연한 전략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에 몰아치는 '혐중' 현상은 무사안일의 징표이자 '금지된 장난'인 셈이다(물론 서방의 '혐중' 공세와 보조를 같이하는 측면도 있다).
'혐중'의 현장 스케치 하나! 지금 우리 매스컴들은 미국경제는 밝고, 중국경제는 흔들린다고 외친다. 정말일까? 올해 미중 양국의 경제성장률을 보자. 미국이 2%, 중국은 5%로 추정된다. 그러면 성장률 1.4%인 한국경제는 뭐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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