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시에 남아 있는 현대사의 증거물인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한 활동으로 시민 아이디어 공모전을 기획합니다. 지난 2월 동두천시가 성병관리소 부지를 매입하면서 동두천시는 매입과 동시에 철거를 기정사실화하였습니다. 철거 후 소요산관광지확대개발사업의 부분으로 유원지화 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철거와 유원지 개발은 역사를 지우고, 묻어버리는 일이라 여긴 시민들이 모여서 옛 성병관리소 보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소요산 공영주차장 인근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는 폐쇄된지 27년이 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미군위안부 여성들이 ‘낙검자 수용소’라 부르던 곳이었습니다. 1970 ~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국가가 나서서 미군위안부 여성들을 성병을 관리하며 ‘깨끗한 몸’을 미군에 제공하기 위해 운영되던 시설입니다. 경기도에만 6곳이 있었지만, 모두 철거되어 그 기억조차 없어졌고 동두천시의 성병관리소만이 유일하게 남아있습니다. 경기도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세계에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 글에서는 성병관리소가 지닌 역사적 사실과 가치를 알리고, 보존 운동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시민 아이디어 공모전 역시 보존과 평화적 활용을 위한 시민들의 지혜와 힘을 모으기 위함입니다.
2022년 9월, 기지촌 여성 인권회복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2014년 6월 25일, 미군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국가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미군위안부 피해 여성 생존자 122명이 미군위안부 제도의 국가 책임을 규명하고자 제기한 소송이었다. 국가가 불법적인 기지촌 조성과 운영·관리, 불법행위 단속 면제와 불법행위 방치, 조직적·폭력적 성병 관리, ‘애국교육’ 등을 통한 성매매 정당화·조장 등의 행위를 했으며, 이러한 행위가 ‘국가의 보호의무 위반’ 또는 ‘성매매의 중간매개 및 방조’에 해당하여 위법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피해를 명확하게 밝히고,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1심 판결은 2017년 1월 20일, 2심 판결은 2018년 2월에 있었다. 그리고 소송 8년이 지난 2022년 9월 29일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되어서야, “국가의 기지촌 운영·관리 과정에서 기지촌 위안부였던 원고들을 상대로 성매매 정당화 · 조장 행위와 위법한 강제 격리수용행위가 있었다”고 국가의 책임과 여성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찾아주기 위한 10년간의 용기와 기다림의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이 있은 지 1년 3개월이 지났지만
국가책임을 공식인정하고 여성 인권 회복을 말하는 목소리는 당연하고도 당당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기지촌과 미군위안부, 기지촌여성은 제대로 된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지촌 여성이 얼마나 생존하는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등에 대한 파악조차 되어있지 않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도 전, 2020년 경기도에서 기지촌여성 지원조례가 제정되었지만 이후 어떠한 지원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조례안은 기지촌 여성의 생활 안정과 복지향상, 명예회복 등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후 군사 안보가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이면서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성매매 행위를 정당화하고 조장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도 담았다. 경기도는 사회적 낙인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기지촌 여성에게 임대보증금 지원 임대주택 우선 공급 등 주거 혜택과 생활 안정 지원금, 의료급여, 장례비, 간병인 등을 지원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조례의 실행은 알 수 없다.
미군기지촌과 성병관리소, 미군위안부
한국전 발발 직후 투입된 외국군인이 1951년 약 20만 명에서 1953년에는 32만 5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자국 여성의 정조관리와 젊은 외국 병사들의 성욕관리가 주요한 문제였고, UN군을 이끄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투력 유지를 위해 병사들을 위무하는 일이 과제로 부각되었다. 전쟁 이후 안보를 목적으로 한반도 곳곳에 미군이 주둔하였다. 그리고 빈곤했던 대한민국에 미군기지를 통해 나오는 달러는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미군병사의 유흥과 성매매 수요는 큰 비중을 차지하며 조그마한 촌락이었던 마을들이 급격하게 기지촌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달러벌이와 성병관리를 위해 효율적인 통제로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전염병예방법과 식품위생법 등을 이용하여 특정 장소인 기지촌에서 허가받은 업자와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등록제를 실시하고, 정기적인 성병 검진을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경찰과 미군은 합동으로 미군 접촉자를 추적하고 검진증을 검사하고 업소를 단속했으며, 성병이 발병하거나 단속에 협조하지 않는 업소에 출입금지 명령을 내리는 등 업주들조차 철저한 관리의 대상이었다. 기지촌정화운동 정책이었다. 한국정부와 미군은 한미친선회의와 기지촌정화위원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기지촌 주변 환경 개선과 성병 문제를 긴밀히 논의했다. 미군 상대 업소와 미군위안부를 대상으로 이른바 교양강좌를 개최하여 위법한 사례가 없도록 할 것이며, 미군들에게 자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선도했다.
특히 미군위안부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어 위안부의 성적 서비스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에 필수요소이며 위안부들을 애국자라 칭하며 달러획득에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미군위안부의 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설을 운영하였다. 이 시설을 성병관리소라 칭한다. 성병진료소에서 정기적인 주 2회 성병 검진에서 낙검되거나(성병보균자로 진단을 받거나) ‘위안부’로 등록하지 않고 미군을 상대하다가 미군에게 적발되면 끌려가 수용되었다. 통원치료로도 완치가 가능했던 성병보균자 뿐 아니라, 검진증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성병에 걸린 미군에 의해 지명될 경우, 무조건 끌려가 수용되어 고단위 항생제가 일률적으로 투여되었다. 당시 성병관리소에서 사용되는 약품은 모두 미군 측에서 제공했다. 수용된 여성들은 강제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항생제 쇼크로 사망하는 여성들도 있어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고통받았다. 미군위안부는 냉전 시기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의 필수적 존재이면서, 가장 미천한 계층으로 취급받던 관리의 대상이었다.
옛 성병관리소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지촌 위안부들을 상대로 성매매 정당화, 조장행위와 위법한 강제 격리 수용행위'. 바로 판결에서 확인되는 위법한 강제 격리 수용행위의 증거물이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이다. 판결이 인권을 회복하는 역사적인 결정인 것처럼 옛 성병관리소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경기도에만 6개소의 성병관리소가 있었고, 각 시설마다 그 운영기간이 상이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고 지역별로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약 30여년간 운영되었다. 포천의 성병관리소는 1970년, 고양시는 1992년, 평택시는 1997년, 파주시는 1999년, 의정부시는 2001년 각각 폐쇄되었다. 동두천시의 성병관리소의 경우, 동두천읍이던 시절인 1965년 양주군성병관리소 설치 조례에 의해 양주군성병진료소가 개설되었고, 1973년 상봉암동 130번지에 140명 수용 규모로 신축과 동시에 이전하였다. 이후 1996년 폐쇄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의 기록은 2002년 발행된 동두천지방행정사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성병관리소의 기본방침이 ‘성병보균자에 대한 집중적 색출과 관리로서 보균자의 완치 및 성병예방을 고취하고 성병퇴치와 주한 외국인은 물론 주민 보건향상에 기어코저 함’이라고 되어있다. 특수업 접객부라는 이름으로 미군위안부를 지칭하였고, 주 1~2회 성병진료소에서 검진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전 윤락여성의 명함판 사진을 민들레 회관 및 관광협회와 진료소에 1매씩 배치한다는 규정도 있다. 또한 전체 윤락여성 홀등록제를 실시하고, 한미합동 단속계도 운영 강화 등으로 성병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는 규정도 있다. 1977년 기록으로 동두천의 등록된 윤락여성이 2,759명이다. 같은 해 검진 인원이 146,055명으로 1명이 최소 50번 이상의 검진을 받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검진 인원 중 4,440명이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등록된 윤락여성의 경우 대부분이 수용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77년의 다른 기록을 보면 한미합동단속 200회, 단속 인원 1,400명, 교육 월 1회로 12회 실시, 수시 지도 계몽, 미성년자의 경우 직업보도학원 입소 조치 등의 행정조치가 있었다.
동두천시의 옛 성병관리소의 부지는 모두 2,300여 평으로 경비실이 입구를 보여주는 위치에 있으며, 너른 마당이 있고, 건물은 210평의 2층 구조이다. 1층에는 진료실과 검사실, 소장실, 식당과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의 구조는 가운데 복도를 두고 화장실과 욕실, 오락실이라는 이름의 회의실, 7개의 수용시설이 있다. 수용시설의 이름은 연실, 송실, 매실, 난실, 국실, 청실, 죽실이다. 수용시설에는 한 방에 20명으로 14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 한 방에 20명을 수용하는 것은 반듯하게 누워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성병관리소들은 모두 철거되어 사라진 역사가 되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유일하게 동두천의 성병관리소 건물이 2023년 현재까지 폐허로 27년간 방치된 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건물의 주인은 동두천시였지만, 부지가 한 사학재단의 소유였다. 동두천시는 수차례 소요산 관광지 개발을 목적으로 매입을 시도하다가, 지난 2월 사학재단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였다.
옛 성병관리소 보존운동의 이유과 활동
매입 이후, 철거를 계획하던 지자체의 주장과 이 장소의 역사와 가치를 보존하자는 시민들의 주장이 첨예하게 이슈화되었다. 동두천시는 성병관리소 자리에 소요산관광
지확대개발을 위한 유원지 시설을 추가하려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동두천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성병관리소를 보존하고 평화와 회복의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병관리소 보존운동이다. 시민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자회견, 언론보도, 시민토론회, 경기도의회토론회, 국회토론회, 서명운동, 거리서명, 문화행사 등을 수차례 개최하여 성병관리소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자 하였다. 지자체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경기도의 정책으로 성병관리소가 보존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시민토론회 중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 어떻게 해야 하나?’를 주제로 지난 10월 개최했던 토론회에서 발제한 정석 교수는 오래된 것이 도시의 힘이며, 성병관리소와 같이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를 보존 활용하는 것은 동두천시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 하였다. 동두천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두천향토사료관 이명수 관장도 자신이 경험한 동두천시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성병관리소에서 고통받던 기지촌 여성들을 보듬어야 한다며 보존을 주장했다.
보존운동을 하는 시민모임이 제시하는 성병관리소 보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보존운동의 이유는 단지 건물을 남기고자 하는데 있지 않다.
첫째,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냉전과 분단, 역사를 증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기지촌과 성병관리소의 역사는 부끄러운 치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병관리소를 철거하자는 사람들은 ‘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것은 남겨두려 하느냐’고 묻는다. 대한민국의 어느 곳이 역사적 상흔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동두천이 겪어온 시간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시절 악착같이 살아온 생존과 번영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 시대를 가장 앞에서 강렬하게 감당하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보존운동의 이유이다. 경기도의 의뢰를 받아 ‘경기도 기지촌 여성 생활실태 및 지원정책연구’를 실시한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자료집에서 “동두천시 성병관리소는 한국사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조물로서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경기도가 구입해 경기도여성인권평화박물관으로 조성하라”고 제언했다.
둘째, 역사를 기억해야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성병관리소의 역사를 지우는 것은 동두천이 숙원하는 미군기지 반환의 정당성을 스스로 지우는 것과 같다. ‘과거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국가도 미국도 당연한 반성과 보상을 해야 한다’고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있다. 성병관리소는 동두천이 보여줄 수 있는 정당한 회복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 존재만으로도 정부와 미국과 협상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반성과 보상을 넘어 인권과 평화가 보장된 안전한 세상에 살고 싶기 때문이다.
셋째, 전 세계의 여러 장소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가 그렇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렇다. 제주의 4.3을 통해 통한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한다. 미군기지촌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시대를 악착같이 살아온 증거물로 생존과 번영을 위한 당당한 시간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넷째, 동두천을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도록 이끌 방안이다. 최근 들어 동두천시에서는 미군기지 반환문제가 이슈화되고 있다. 평택미군기지 확대, 병력 집중화로 동두천시의 미군기지는 오래전에 반환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환 약속은 1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지켜지지 않고, 여전히 동두천시 전체면적의 42%를 차지한 채로, 미군 병력은 4천여 명에 불과하다. 동두천시는 지자체와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미군기지반환범시민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기지반환과 국가의 정책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심각한 경기침체, 인구감소 등의 해소에 미군기지 반환은 필수적일 것이다. 동두천의 시민 누구에게나 미군기지의 존재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기지촌 여성과 기지촌의 역사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보상과 시혜로 풀어낼 수 없는 역사가 동두천에 있으며, 동두천이 먼저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통한 살길을 제시해야 한다. 평화가 전제로 되어야 분단과 전쟁, 기지촌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순간, 다시 그 과거가 반복될 것이다
미군기지촌 문제는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이다. 경기도는 주한 미군부대의 60%가 주둔하고 있고, 그에 따른 미군기지촌 문제도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미군위안부의 문제도 그만큼 집중되어 있다. 경기도 전역에 산재해 있으나 지역마다 겪은 역사적 경험은 다르다. 파주와 연천, 포천의 미군기지촌은 1970년대초 미군 감축과 재배치로 크게 쇠퇴하였고, 반면 동두천과 평택의 기지촌은 병력의 이동과 집중으로 1970년대 이후 활황을 맞았다.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 미군의 구매력 쇠퇴, 미군의 전략적 재배치 등으로 기지촌은 크게 쇠퇴하였다. 2000년대 초반 반환이 약속되었던 동두천의 미군기지는 반환되지 않았고 동두천의 기지촌은 침체한 채 생존하고 있다. 지금은 외국에서 온 여성들이 평택, 동두천 등의 기지촌에서 그 자리를 메꾸며 또 다른 사각지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물며 존재하고 증언하는 역사를 지우고 묻어버린다면, 되돌아올지 모를 과거에 더 심한 고통과 참담함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분단과 전쟁까지 한반도의 역사는 기억하고 되새기지 않으면 거짓으로 포장된 평화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 현장에 살았던 이들이 지금도 살아서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답하지 않는다면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일지 의심된다.
동두천과 한반도에는 살아있으되 들리지 않고,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순간들과 이를 온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찾아 듣고 답하는 역사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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