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1945년 해방 직후사>는 연구서이면서 또한 교양서다. 저자는 연구서를 목적으로 집필한 것인데 독자 대다수는 교양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구서는 독자의 연구활동에 활용되는 '생산재', 교양서는 독자의 만족을 위한 '소비재' 성격을 가진다.)
연구서가 교양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세계적 추세를 디지털혁명이 더욱 촉진하고 있다. 연구논문과 연구서 등 연구문헌은 지면 인쇄보다 디지털 형태로 옮겨가고 있다. 적은 비용으로 수요자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되고, 번역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라 다른 언어권 연구자들의l 이용이 쉽게 되어가고 있다. (사전류와 연구자료가 디지털 형태로 넘어가는 뒤를 연구문헌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책의 공간은 교양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현대사는 현실과의 관련성으로 일반인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에 연구서라 해도 교양서로 받아들이기 쉽다. 정 교수는 이 수요에 잘 부응해 온 연구자인데 나는 그가 교양서 측면을 더 중시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교양서로서 <1945년 해방 직후사>에 관한 의견을 내놓는다.
1. 맥락을 중시할 필요
교양서는 연구서에 비해 ‘맥락’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패전 직후 몇 달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이 이 책의 주제인데, 내부 진행만이 아니라 국제적 맥락을 살피는 것이 주제의 이해를 위해 불가결한 작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이 측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커밍스의 1986년 책 하나만이 보인다.
넓은 범위의 맥락을 살피는 일은 기존 연구의 검토를 통해 이뤄진다. 사료를 직접 검토해야 '연구'의 자격이 있다는 학계 통념을 현대사 연구자들은 앞장서서 벗어나야 한다. ‘현대’라는 시대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넓은 연관관계 위에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사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보기에 연관관계의 제시가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 몇 가지를 예시한다.
- 카이로선언의 의미
조선의 전후 독립에 대한 국제적 합의의 증거로 카이로선언이 이 책에서도 제시된다. 그러나 그 ‘합의’가 얼마나 탄탄한 것이었는지, 이 선언의 '증거' 가치가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 선언에만 의지해서는 아전인수의 굴레에 묶일 위험이 있다.
1943년 11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 자세를 가다듬기 위한 목적으로, 유럽 방면 작전을 논한 직후의 테헤란회담과 별도로 아시아 방면 작전을 논한 회담이었다. 작전회의 성격의 회담에서 나온 선언인 만큼 국제법적 구속력이 약했다.
카이로회담 직전의 4개 모스크바선언 중 "오스트리아선언"을 카이로의 한국 관계 선언 내용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선언은 각각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해체에 목적을 둔 것인데, 오스트리아선언에는 오스트리아 독립을 명시하면서도 조건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 독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되며, 최종적 (전후) 처리에는 자신의 해방에 대한 자신의 공헌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독일에 저항하고 연합국에 협력해야 독립을 쉽게 해준다는 노골적 협박이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에도 같은 조건이 암묵적으로 붙어 있었다고 봐야겠다. (특히 "in due course"란 대목에) 오스트리아는 결국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
- 미국의 국제주의와 국가주의
미국은 "American exceptionalism", "America first" 등으로 표현되는 국가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윌슨과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는 세계대전이라는 비상상태 아래서만 현실정치에 제기될 수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윌슨이 제창한 국제연맹을 외면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국가주의 회귀는 루스벨트의 부재 때문에 더 급격했다. 그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이다.
루스벨트의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번즈는 갑자기 대통령이 된 트루먼에게 전폭적 신임을 받고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전후 처리에 앞장섰다.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번즈였다고 한다.) 트루먼은 몇 달 후부터 번즈의 노선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나 번즈는 1947년 초까지 국무부를 지켰고, ‘트루먼 독트린’은 번즈의 사임 직후에 나왔다. 매카시즘 소동이 국무부를 첫 번째 과녁으로 삼은 사실도 이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번즈의 국무부가 루스벨트 사후 2년 가까이 국제주의의 보루로 남아있는 동안 국방부는 국가주의의 흐름을 탔다. 종전 후 당연한 국방예산과 병력의 감소를 억제하려는 일부 군인들의 의지가 국가주의 회귀의 동력이 되었고, 그 대표적 인물이 맥아더였다. 군정사령관 하지가 이승만을 극진히 대한 것도 신탁통치안 번복에 올인한 것도 군 편제상 직속 상관인 맥아더와의 관계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할 일이다.
- 소련, 중국, 일본의 상황
주변 여러 나라의 상황에도 이 책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파악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일본의 경우, 옥쇄의 각오만으로 종전을 맞았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관점이다. 총독부도 비밀리에 정보를 획득하고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무능-무책임이다.
저자는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증언에 입각한 모리타의 1964년 책 내용 중 "8월 15일 시점에서 한반도 분단을 일본 내무성과 총독부가 인지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76쪽) 단언하는데, 의문이 남는다. 분단점령 방침이 공식적으로 확정되기 전이라도 항복 조건의 비밀교섭 과정에서 거론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항복 당시에는 말할 수 없던 것을 전범재판과 미군정이 끝난 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중국은 미-영-소와 함께 연합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전쟁에 대한 공헌은 작았다. 게다가 장개석 정권은 다른 연합국의 심한 불신을 받았다.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충칭을 떠난 후 상하이에서 몇 주일 지체한 것은 장개석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인접한 연합국 중국이 한국 문제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이 김구와 임정계 몰락의 배경이 되었다. 장개석의 중국이 처해 있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 본토에 대해서도 지분을 (최소한 홋카이도라도) 요구할 것으로 미국 관계자들이 예상했던 소련이 38선을 받아들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8-15 당시에 이미 조선 진주를 시작하고 있었던 소련이 북조선 점령으로 만족한 것은 엄청난 양보였다. 얼마 후 소련은 전략적 가치가 큰 이란에서도 쉽게 물러났고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혁명에도 냉담했다. 동유럽에 대한 스탈린의 병적인 집착을 빼고는 당시 소련의 아시아 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
2. '실증'과 '추론'의 영역
역사 연구에는 실증이 중시된다. 그런데 실증의 '실(實)'에는 '실제(實際)'와 '충실(充實)'의 두 가지 뜻이 엇갈린다. "있는 그대로"의 뜻도 되고 "의미가 깊은"의 뜻도 되는 것이다. 랑케의 표어로 통하는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의 해석에도 "eigentlich"를 "실제로"로 해석하는 통설에 반대해 "본질적으로"로 이해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실증'의 의미가 무엇이든, "실증되지 않은 사실은 배척한다"는 식의 배타적 "실증주의"에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실증이 이뤄지는 데는 일정한 현실적-기술적 조건이 필요하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선별한다면 현재의 권력이 과거의 실상을 왜곡시키는 길이 열린다.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추론’의 역할이 있다.
왜곡의 의도가 없더라도 안전을 위해 실증주의의 방패 뒤에 숨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 불만을 느끼는 몇 가지 사례를 예시한다.
- 조선 인민의 '열망'
해방 당시 조선 인민의 열망이 독립에 있었고, 나아가 민주국가 건설에 있었다는 견해에는 오늘의 조건에 따라 재단된 측면이 있다. 인민의 마음에 기쁨 못지않게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해방 당일의 적막한 거리 풍경이 말해준다.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군정청 여론국의 조사 결과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설문의 4개 선택지에 대한 응답자 8453명의 선택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이 조사 결과를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응답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의미가 제한된다. 독립 '열망'의 표현에도 '독립'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열망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악질 친일파만이 아니라 '독립'의 의미를 정말 깊이 생각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 당당한 민족주의자 못지않게 최남선 같은 '변절자'에게서 얻을 교훈이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조선은행권 거액 발권
조선총독부는 9월 8일 미군 진주 전에 약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해방 전 화폐량의 55-70%로 추정되는 거액이다. 인쇄 자체부터 벅차 징발된 민간 인쇄소에 평판(平板)을 보내 인쇄를 맡겼고, 정판사 위폐사건도 그런 평판 때문에 일어났다.
이 거액의 행방이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김계조 사건, 박흥식 사건 때 500만 원, 1000만 원의 출처가 빙산의 일각처럼 밝혀졌을 뿐이다. 상당 부분이 한민당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은 분명하다. 집회의 인원 동원,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자금 제공 등 당원들의 주머닛돈으로 보기 힘든 돈이 많이 움직였다.
일상생활에 쓰이지 않는 고액권(100원)으로 발행되었으므로 얼마동안은 뭉칫돈으로 쌓여 있다가 서서히 풀려나오기 시작했는데, 1946년 4월 미군정의 양성화 조치가 눈에 띈다. 인쇄 품질이 나빠서 상인들이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붉은 돈"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조선은행이 보장하게 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화폐라면 '위폐'인데, 그 유통을 군정청이 보장해준 것이다. 군정청 관계자들의 몫은 얼마였을까. (송남헌의 회고 중 1946년 6월 하지가 김규식에게 줬다고 하는 6백만 원도 군정청 공식 예산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 돈이 한민당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맡았을 것은 밝혀진 윤곽만으로 충분히 추정되고, 민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일이다. 그 구명을 위해 '실증'에 그치지 않고 '추론'까지 동원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 '중도'의 역할
위에 언급한 1946년 8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70%의 찬성을 받은 "사회주의"는 곧 중도 민심의 표현이다. 자본주의-공산주의의 극단을 꺼리는 민심이었다.
중도노선의 바탕은 민족주의였다. 정치체제의 선택은 민족주의와 다른 층위의 문제이므로 부차적 과제로 미뤄두고 민족국가 수립을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우익=민족주의" 등식은 극우파의 참칭이었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성향을 침소봉대한 극우파의 모략으로 인해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제 자리를 잃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이 인민위원회 구성에 민족주의 세력과 좌익의 합작을 유도한 데는 중도노선의 존중이 있었다. 좌익의 집권은 소련군이 허용한 자치권 위에서 서서히 (토지개혁의 성과 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반면 미군은 장기간의 군정을 통해 민심의 자연스러운 발전과 표현을 가로막았다. 분단에 임해 많은 민족주의자가 이북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해방일기 4> 머리말에 중도노선에 대한 내 생각 적은 것을 옮겨놓는다.
"반면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이북과 같은)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좌우합작을 통해 역할을 스스로 만들러 나선 것이었다.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승자가 써준 역사의 장벽을 넘어 과거의 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실증'의 기준을 최대한 늘려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아무리 많이 남아있더라도 논리에 맞지 않는 "우익=민족주의" 등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저자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
나는 전통시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30년 전부터 제도권 학계를 벗어나 공부하다 보니 현대사에 마음이 많이 가고 그쪽 글도 많이 쓰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현대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서 역사학의 길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현상을 연구하더라도 그 의미가 현대사를 통해 확인된다는 생각이다.
현대사 연구 성과가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물 성격을 띠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시대 연구의 성과도 교양물 성격이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현대사 쪽은 연구 자체부터 좋은 교양물 만드는 목적의식을 앞세우기 바란다.
정병준 교수의 책들 중에는 문제의식과 서술방법 모두 교양서의 성격을 잘 갖춘 것이 많다. 이번 책은 그 점에서 오히려 다소 물러선 것 같아 아쉽다. 학계의 제도적 관행에서 슬슬 풀려나 자기 틀을 세울 만한 시점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아쉽다.
불원간 몇 주일 시간을 내 이 책을 확실한 교양서로 만드는 리메이킹 작업을 하면 좋겠다. 그런 작업은 단순한 독자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장차의 연구계획을 세우고 다듬는 데도 유용한 발판이 될 것이다. 교양서는 저자와 편집자의 합작물이라는 점에서, 편집자의 더 적극적인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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