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전북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반일투쟁 사건에 이름을 올렸던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혁근 열사의 삶과 활동을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원도연 원광대 교수(게임콘텐츠학과)는 12일 오후 익산청년시청에서 열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이리·익산의 인물들'이란 주제의 포럼에 참석, '1927년 이리신간회 사건과 임혁근 열사'에 대한 발표에 나섰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1912년 이리역이 들어서며 이리·익산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갔고, 1920년대에는 신문기사에 이리가 거의 매일 등장할 정도로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냈다.
익산 금마에서 태어난 임혁근은 1924년 '갑자연구회' 사건으로 이리·익산의 사회운동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93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년의 기간에 무려 7년 10개월 동안 투옥생활을 할 만큼 가열찬 반일투쟁의 삶을 살았다.
원 교수는 "1920년대 독립운동을 대표한 사건이 1927년의 신간회 사건이었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이 폭풍처럼 몰아쳤던 시기여서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과 활동이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해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통일전선이었다. 임혁근은 같은 해 6월에 신간회 익산지부를 설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강경한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혁근이 뜻을 이루지 못한 배경에는 신간회를 조선독립의 수확기로 규정하는 등 강력한 저항의식이 바탕이 되었기 떄문이었다. 임혁근은 신간회 익산지부 사건으로 생애 두 번째 징역을 살았고, 출감 이후 다시 열렬한 반일투쟁에 나서게 된다.
임혁근 열사는 1928년에 조선 사회 전체를 뒤흔든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최고형인 5년형을 선고받아 생애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임혁근은 1934년 8월 만기 석방을 두 달여 앞두고 폐결핵을 얻어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같은 해 6월에 36살의 나이로 전주에서 사망했다.
원 교수는 "임혁근 열사의 명예는 1990년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회복되었다"며 "그는 1920년대 한국에서 가장 뜨겁게 살다간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임혁근은 항상 실천의 현장에 있었고 끊임없이 일제와 싸웠지만 우리는 정작 그를 잘 알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원 교수는 "이번 연구는 임혁근의 한 개인을 미화하거나 영웅화하려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이런 인물 연구가 이리·익산의 1920년대를 재조명하고 역사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가는 노력의 출발이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포럼은 1920년대 후반 이리·익산의 자랑스러운 항일 독립운동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황성근 익산독립운동사기념회 상임대표는 기조강연을 통해 익산 근대기 의병운동과 독립운동기념사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익산문화도시지원센터 소속 이명진 박사는 1920년대 후반 이리·익산에서 독립운동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청년회를 소개하며 그 의미를 공유했고,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전북의 독립운동과 기자운동을 발표했다.
자유토론에서는 오대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과 이균형 전북CBS 보도국장,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이 모여 발제 내용의 역사문화적 가치에 대해 함께 논의했다. 익산시는 향후 포럼 결과를 시민들과 공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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