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핵관'으로 불리는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를 시사했다. 장 의원의 '불출마' 시사와 함께, 최근 '불사퇴' 의지를 밝힌 김기현 대표의 당권 강화 움직임은 용산과 여의도 간 역학구도가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용산은 힘이 빠지고 있고, 여의도는 힘이 세지고 있다.
장 의원은 11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친인 故 장성만 전 국회부의장의 묘소를 찾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버지가 주신 신앙의 유산이 얼마나 큰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고 적었다. 이어 그는 "아버지의 눈물의 기도가 제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는 힘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며 "보고싶은 아버지! 이제 잠시 멈추려 합니다"라고 했다. 장 의원은 "아무리 칠흙(칠흑)같은 어둠이 저를 감쌀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계신 것을 믿고 기도하라는 아버지의 신앙을 저도 믿는다"고 했다.
장 의원이 불출마를 시사한 것은 공교롭게도 인요한 혁신위원회의 '혁신 활동'이 종료된 후다.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은 앞서 장제원 의원 등 윤석열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의 불출마를 '혁신 과제'로 추진한 바 있다. 그 배경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공천 과정 등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위기감, 그에 따른 윤 대통령에 대한 '변화' 요구가 있었다.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윤핵관의 2선 퇴진'으로 치환하려 시도한 게 인요한 혁신위였다. 그러나 두 번의 패착으로 몰락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에 신뢰를 보냈을 때 인 위원장은 김 위원장과 친분을 과시하며 '혁신'의 깃발을 올렸다. 첫번째 패착이었다. '김한길 배후론'이 혁신의 당위성을 집어삼켰다. 다급해진 인 위원장은 이번엔 용산의 '신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두번째 패착이었다. 인 위원장이 용산을 언급하자마자 '혁신위 = 윤석열' 등호가 성립되면서 모순에 빠졌다. 여권 위기의 원인이 윤 대통령인데, 윤 대통령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윤핵관'의 자리에 '신핵관'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여의도에 돌았다. 결국 '핵관 물갈이'가 혁신의 목적지였다. 대통령실 출신 총선 출마 대기자들이 줄줄이 지역으로 내려가고, '검핵관(검사 출신 핵심 관계자)'들이 공천을 받을 것이란 '루머'가 힘을 받으며 어설픈 정무 기획의 실체가 또렷해졌다.
이 틈을 타 '핵관 중의 핵관'이라는 장 의원은 수천명의 지지자들을 대동한 대대적인 지역구 행사를 홍보했다. 이런 '무언의 시위'가 혁신위의 힘을 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다. 혁신위의 발판을 걷어치운 것은 사실상 장제원 의원과 김기현 대표로 상징되는 '윤핵관'과 '당권파'다. 힘이 빠진 것은 '용산'을 등에 업고 여권 내 '소(小)정계개편'을 기획했던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다. 처음엔 팽팽한 듯 보였던 두 세력의 역학관계에서, 이젠 '승패'가 분명해졌다.
장 의원이 인요한 혁신위의 '빈손 퇴장' 이후 불출마를 시사한 것은 혁신위 활동 시절과 지금, 여권 내 역학구도가 완전히 변했다는 걸 방증한다. 장제원 의원으로서는 '인요한에 밀려 퇴장했다'는 불명예보다, 스스로 퇴장했다는 명예가 '정치적 리워드'를 강화할 수 있다. 실제 불출마를 하더라도 최소한 본인의 지역구 공천에 영향을 유지할 수 있고, 내각 입성도 노려볼 수 있다. 정치권에선 '희생'도 권리다. 여의도의 역사에서 불출마를 선언할 시간도 없이 퇴출된 정치인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장제원 의원은 '명분'에서 용산의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당내 상황도 흥미롭다. 김건희 특검법을 다뤄야 하는 김기현 대표를 위시한 '당권파'에 힘이 쏠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적극 엄호해왔던 '친윤' 성향 의원들이 '김기현 사퇴론'을 제기하는 비주류 중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용산의 엄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이는 지난 8일 혁신위 활동 종료 후 윤 대통령이 김기현 대표와 비공개 오찬을 한 이후 벌어지고 있는 기류 변화다. 윤 대통령이 김 대표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핵심엔 윤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 된 김건희 특검법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대통령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김건희 리스크'가 야당의 정치공세에 불과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방치됐다. 모두가 이 리스크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정권 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통령은 자신의 힘을 맹신했다. 하지만 여론은 정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당대표를 '내부 총질' 한다며 쫓아내고 당권 주자들을 하나하나 주저앉히고, 보궐선거 공천을 좌지우지하던, 여당 위에 군림하며 당을 쥐락펴락 해 왔던 윤 대통령은 이제 당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가 됐다.
올해 초만 해도 '내년 총선 170석'을 공언하던 대통령은 측근의 '불출마 선택' 권한을 빼앗는데 실패했고, 본인이 세운 당대표에 밀리고 있다. 대통령의 힘이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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