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공동체를 품는 도시를 꿈꾸는 도시계획 연구자와 영화 프로듀서 부부의 새로운 도전
경포 남쪽에 있다고 하여 포남동, 혹은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을 뜻하는 '보래미'가 한자화하여 현재 강릉의 포남동이 되었다고도 전해지는 곳. 쇠퇴해가는 강릉의 구도심으로 인구 2만 명이 넘지 않으며 도시재생활성화 구역에 해당된다.
무심하게 보면 흔한 시가지 골목이다. 그렇게 주소지를 찾아 차를 꺾기도 쉽지 않을 듯한 좁은 골목 안쪽으로 발길을 내딛는 순간, 예상밖 풍광이 우리를 맞는다. 250평 대지 위에 소담히 자리한 한옥을 현대적 재료까지 버무려 새롭게 재해석한 공간, '스페이스닷 강릉'이다. 일반 투숙객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10~20명 규모의 기업 워크숍, 단체 행사 등의 목적으로 공간 대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스페이스닷 강릉은 100년 가까이 외관을 유지해온 옛 한옥 공간을 다시 꾸며 만들어졌다. 한별은 건축을 전공한 도시계획 연구자, 채은은 영화 프로듀서다. 이들 부부는 지난 2014년 한별이 방문교수로 있게 된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 8개월 머무르면서 도시가 편의성을 제공하면서도 자연과 공동체까지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이 바로 지척인데, 또 다운타운도 가까운 곳에 있어요. 더욱 놀랐던 건 지역의 로컬 커뮤니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축제를 하면 지역 예술가 지도를 들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죠. 서울만큼 거대하진 않아도 밴쿠버가 작은 도시가 아닌데 자연과 문화, 도시적 편리성이 공존하는 모습에 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채은)
부부는 귀국 후부터 서울을 탈출하겠다는 모색에 들어간다. 강릉이 애초 계획에 포함됐던 건 아니다. 순천, 대전, 제주에 이르기까지 5년 가까이 탐구는 이어졌다.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서울 집값도 이들의 탈출 욕구를 부추겼다.
"90년 된 폐가를 본 순간, 여기다 싶었어요. 둘이서 대화를 나누면서 오래된 이야기를 담은 공간이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집을 만난 거에요. 빚을 갚아야 하나 고민하던 목돈을 모두 털어 저질러 버렸죠. 부담이 크지 않으면서도 접근성도 좋으니 딱 우리가 찾던 집이었죠." (채은)
건축을 전공한 한별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도시 연구자이기도 하기에 집을 보수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거라 여겨졌는데 왠걸, 손사래를 친다.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내가 건축과를 나왔는데, 실제 벽돌이 어떻게 쌓이는 지 잘 모르더라구요. 이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고. 전기와 설비, 행정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부대끼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내 위치도 알게 됐죠." (한별)
다행히 강원도 창조경제혁신센터로부터 '로컬 크리에이터'로 지정되고 관광공사의 지원도 받아 보수 공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태양광 설비 지원을 받았는데, 애초 생각한 전기 요금의 5분의1 수준이라니, 그토록 걱정했던 관리와 운영에도 큰 힘이 됐다.
스페이스닷을 찾은 이들이 가장 좋았다고 꼽는 요소는 공간이 주는 영감이다. 고급 자재만 고집한 것도 아니며 굳이 서울의 건축업자를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전통 한옥의 공간 구조는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집을 떠받치는 주요 기둥의 썩은 밑둥만 도려낸 뒤 새 나무를 이어 붙이는 등 최대한 기존 한옥의 골격을 지키는 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전통 한옥이라기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오래된 집, 고옥이라 부르는 게 더 맞을 거 같아요." (한별)
"이곳에 오는 분들이 조금 다른 식으로 느끼고 몰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창의적인 워케이션이 가능한 곳 말이에요. 실제 공간적 경험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해주세요. 오셔서 이따금씩 한곳을 응시하면서 멍 때리기를 즐겼다는 분들도 많았구요." (채은)
오랜 세월 기온 변화와 습기를 버텨온 나무의 질감, 아우라는 이런 것일까? 곳곳의 이어붙인 매듬새를 쳐다보고 있자니 정말 나도 모르게 멍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2층은 한옥 느낌보다 북유럽 인테리어의 오두막 다락방에 오른 기분이다. 낮은 서가에 놓인 책들과 한켠에 놓인 피아노가 독서욕, 연주욕을 자극한다. 아니 그보다 뉘인 햇살을 받은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한 잠 느긋이 붙여보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휴가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부부가 공간을 조성하느라 땀을 흘리는 시기에 바로 이웃한 650평 대지 위에 주변 환경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인구밀집형 주택을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다. 건축허가 등 조건이 여의치 않아 결국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그 사이에 땅주인도 몇 번 바뀌었다. 한별은 바뀐 땅 주인에게 분할 개발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각자의 개성을 갖춘 작은 공간들이 옹기종기 들어서면 이곳 포남동은 살아 숨쉬는 커뮤니티 타운이 될 것이다. 이미 사람들이 오가는 샛길도 그대로 살린다면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공간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어디든 아파트 천지잖아요. 도시가 개발업자들의 놀이터가 되어 그 안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이 만든 능선이 한꺼번에 사라져가는 거죠. 그러한 개발에 맞서 저희가 알박기를 한 걸까요?" (채은)
어떤 '알박기'는 선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스페이스닷이 만들어갈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갈 관계의 미래가 무척 궁금해졌다.
*이 글을 기고한 김중배 님은 <연합뉴스>와 <연합뉴스TV> 기자를 거친 독립 언론인으로 현재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운영하는 ‘소셜 코리아’의 책임편집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를 공론화하고 정책적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소셜 액셀러레이터를 표방하며 관련 기획과 홍보 등 활동을 영위하는 ‘프렌딘니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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