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하고 어울리다 보니 가끔은 그들의 언어가 무슨 말일지 헷갈릴 때가 많다. 특히 언어학을 하는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어휘 변화가 얼마나 황당하고 근거가 없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개를 일컬어 ‘댕댕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정말 몰랐다. 결국 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나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아마 필자 세대의 많은 독자들은 아직도 왜 ‘개를 댕댕이’라고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은 문자의 장난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멍멍이와 댕댕이가 언뜻 보기에는 같은 글자(멍≡댕)로 보이기 때문이란다. 한때 비빔면을 ‘네넴띤’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도 동일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글자를 비슷한 형태로 변형시켜서 발음하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즐’ 자를 영어로 ‘KIN’이라고 쓰기도 한다. 즉 ‘즐’ 자를 옆으로 눕힌 형태이다.
우리말에서 ‘개’라는 접두사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 쓴다. 즉 ‘개’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주로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말할 때 쓴다. 예를 들면 ‘개살구, 개복숭아, 개나리, 개머루, 개오동’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생에서 나는 별로 질이 좋지 않은 것을 일컬을 때 ‘개’라는 접두사를 쓴다.(물론 요즘은 개복숭아가 더 비싼 것 같기도 하지만) 과거 일제 강점기 하에 지식인들이 일본 순사를 일컬을 때 ‘개+나리’라는 표현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는 쓸데없는 것이나 헛된 것을 일컬을 때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개꿈을 꿨어.
김서방이 개죽음을 당했다는군.
이라고 할 때는 쓸데없는 것을 일컬을 때 쓰기도 한다. 혹간에 좀 정도가 심한 것을 일컬을 때 쓰기도 한다. 요즘에 많이 쓰는 말 중에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라고 할 때 쓰는 것과 같다. 정도가 지나치게 심할 정도로 고생한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에 쓰는 단어로는 ‘개망신, 개판, 개꼴, 개고생’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 참 개판일세!”라고 할 때는 정도가 심한 것을 나타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개’라는 접두사는 우리말에서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요즘은 젊은이들은 마치 발어사처럼 ‘개’ 자를 붙여서 말을 한다.
야! 걔 요즘 피부 개좋아졌어.
태호야! 이 폼클 써 봐. 개좋아.
라고 쓰는 것을 종종 본다. 그 중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ㄹㅇ개좋아!”였다. 나중에야 그것이 “레알 개좋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에는 ‘개’라는 접사를 붙이면 ‘바람직하지 못한 것, 쓸데없는 일, 하찮은 것’등을 말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개좋아’라는 말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기야 요즘은 ‘개엄마, 개아빠’도 많으니 개가 좋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상식적인 일반언어학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사람이 개의 집사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접사 ‘개’의 의미가 변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마는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꼰대가 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요즘 우리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 중에 ‘중꺽마’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을 줄인 것이다. ‘중꺽그마’는 “중요한 것은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문장을 축약하여 마치 사자성어를 만들 듯이 활용하는 모양이다. ‘알잘딱깔센’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를 줄인 말이다. ‘갓생’은 “God + 생”으로 ‘부지런하고 모범적인 삶’이라고 한다. 언어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니 할아버지와 손주 간에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유행에 민감하다. 특히 연예인들은 유행어를 만들기 위하여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한때의 유행으로 지나치는 말과 아름다운 우리말 사이에서 한국어가 개고생(?)하고 있다. 유행은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지만 표준어를 바꿀 정도까지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보전했으면 하는 소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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