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운동권에 대한 이상한 선망 같은 게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내가 호남 출신이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 치고 꽤 유식한 척을 떨던 나는 몇몇 86 인사들의 이름을 어디선가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86이 한국 사회의 희망이고 횃불이라고 생각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 졸업 후 기자가 돼 국회에서 처음 마주한 86은 뜨악한 존재들이었다. 낮에는 '민주주의' 같은 거대하고 멋진 말을 구사하다 저녁이 되면 '개저씨'가 되었다. 술을 강권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다가(실내 흡연 금지법 시행 전이었다) 취기가 돌면 '라떼' 이야기를 읊어대는. 10년 전이면 뭣이 문제인가 싶은 평범한 풍경이겠지만 나는 실망스러웠다. 내 머릿속의 86은 정치인을 넘어선 성인군자 같은 존재였는데, 현실 속 86은 성인이든 군자든 하여튼 그런 존재와는 거리가 많이 멀어 보였다. 기대가 지나쳐 그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다.
내 개인적인 감상과는 상관없이 당시 민주당 안에서 86은 당의 기둥이요,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국회에 왔을 때 거의 처음 맞닥뜨린 장면은 Z세대 정치인 박지현의 '86 용퇴론' 회견이었다. 박지현은 공동비대위원장인 윤호중의 면전에서 86의 아름다운 퇴장을 요구했다. 내가 그새 나이를 많이 집어먹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10여 년 전 86의 권세는 철옹성처럼 강고해 보였다. 86이 무너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새 86은 마땅히 물러나야 할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단지 그들이 나이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민주당이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만든 '적폐'로까지 지목되고 있다. 86은 어쩌다 용퇴의 대상이 되었을까.
청와대와 민주당 당직을 두루 거친 황두영 작가는 최근 저서 <성공한 민주화, 실패한 민주주의>(황두영 지음, 클)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차근히 풀어낸다. 그의 당직자 시절 마지막 직함은 박지현 비대위원장의 정무조정실장이었다. 80년대 초중반생인 그는 '86 윤호중'과 'Z세대 박지현' 두 보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는 경험을 하며 이 책의 갈피를 더욱 분명하게 잡은듯하다.
황 작가도 글의 서두를 86에 대한 험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86 용퇴론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밑도 끝도 없이 '물러나라'는 식의 주의‧주장을 배격한다. 그는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86 용퇴론을 1960년대생을 대표하는 몇몇 정치인의 거취 문제로 보지 않을 때, 우리 정치가 반성을 시작할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전제를 새겨두지 않는다면 이 책을 보며 '86 당장 물러나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저자는 86을 아주 독하게 해부한다. 86에 대한 저자의 집요함은 흡사 금쪽이의 문제 행동 원인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오은영 박사의 눈빛을 떠올리게 한다. 그 집요함 덕분에 독자들은 불가해의 영역 같던 86 집단의 뇌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아이들'에서 민중의 선진 대오로
이 책의 기본적인 틀은 '반성'이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한 정부는 대통령 지지율이야 어떻든 실패한 정부다. 문재인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을 지낸 황 작가는 문재인 정부 실패의 요인, 더 정확하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86식 정치에서 찾는다. 그는 이 책과 같은 주제로 <프레시안>에서 연재 칼럼을 진행하고 있는데, 칼럼명이 '문 대통령께 드리지 못한 고언'이다. '문 대통령께 86 정치의 문제에 대해 고언을 드리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것이다(일개 행정관이 대통령께 직접 고언을 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논외로 하자).
도대체 86 정치는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86 개념부터 짚어보자. 86은 1960년대생, 1980년대 학번의 옛 운동권 집단을 일컫는 조어이지만, 저자는 그런 일반 정의를 뛰어넘어 86세대가 구축한 특정한 '정치적 세계관'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86 정치의 본질을 '포퓰리즘'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퓰리즘은 우리가 흔히 '인기영합주의'라고 말하는 '포퓰러리즘(popularism)'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사회 구성원을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두 진영으로 나누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흑과 백, 아와 피아의 이분법에 의해 작동하는 의식체계다.
86 포퓰리즘은 박정희 체제에서 서서히 배태된다. 분단국가 콤플렉스 극복이 국가적 과제였던 그 시절, 박정희는 남한 단독 정부의 완성을 목표로 멸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독재 정권을 구축한다. 그에 맞서 86은 남북이 하나된 통일 정부를 꿈꾸며 독재자 박정희 타도를 꾀한다. 기껏해야 중‧고등학생이었을 86이 일찍이 조국의 미래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다고 믿는 '자의식 과잉'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박정희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며 '민족중흥'과 '구국'의 주체로 각성한 것이다.
그들은 박정희를 타도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문제는 박정희가 사망한 후였다. 박정희가 사라졌는데도 독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86은 그 이유를 미 제국주의에서 찾았다.
"그들은 미국을 정점으로 그에 복무하는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독재정권과 매판자본이 떠받치는 '미국―엘리트 세력', 그리고 그들에 의해 짓밟힌 '민족―민중'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세상을 이해했다. 그리고 민주화를 전후한 시점에서 열린 정치적 공간과 경제성장에 따른 청춘세대의 정치적 욕망을 흡수하여 한 세대를 뒤흔드는 정치운동을 만들어냈다. 그 점이 그 이전, 이후 세대와 다른 점이다. 나는 이러한 정치적 사고와 운동을 '86포퓰리즘'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19쪽)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 명문대생이 된 86은 선출직도 아니면서 스스로 민중의 대표를 자처해 미 제국주의에 맞선다. 그들은 민중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를 먼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86들은 먼저 깨달은 자, 나머지 민족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86들과 나머지 국민들의 관계는 단지 이해관계나 정치적 입장이 다른 자가 아니라, 깨어난 자와 최면상태에 있는 자의 관계가 된다. 그렇기에 86들은 다른 시민들을 이끌 자격을 갖추게 되며, 다른 시민들을 설득하는 건 오히려 윤리적인 당위성을 갖는 행동이 된다."(76쪽)
이들은 민중의 선진 대오가 되기 위해서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며 솔직, 소박, 겸손과 같은 개인의 도덕을 강조했다. 이른바 '품성론'이다.(☞관련기사 : 김민석의 '송영길을 위한 변명'은 틀렸다)
"두루뭉술한 말들에 취한 채 그 속에서만 사는 것 같았다"
86은 기본적으로 탑재된 뛰어난 언변 능력과 높은 도덕성, '독재 타도'와 같은 선명한 구호로 민중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6월 항쟁의 주역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 등 형식적 민주화를 이뤄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었던 그들은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선출직 공무원이 되어 양복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그러나 그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 중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집권 능력의 한계, 86 세계관의 한계가 서서히 드러났다.
"가진 것은 열정뿐인 대학생이던 그들이 점차 사회적‧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갈수록 문제는 커진다. 그들도 때로는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부당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종 사회적 민폐가 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여전히 그들이 다른 집단의 평균보다는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동지에 대해 도덕적 단죄가 불가능한 수렁은 86 전체의 도덕적 기준을 점차 낮추는 역할을 한다."(125쪽)
"문제는 '국민'을 '기득권 엘리트'의 대척점에 선, 궁극적으로 단일한 집단으로 전제하는 정치관이다. 86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국민·서민·민중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사모펀드 불법투자와 입시비리는 서민도 할 수 있는 범죄라고 우겼다가, 양질의 주택을 바라는 사람은 모두 스크루지라고 우겼다가 하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22쪽)
이런 모순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건이 바로 조국 사태였고, 부동산 정책 실패였고, 안희정·오거돈·박원순의 성 비위 사건이었다. 저자는 "이견을 내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조율하는 어려운 방식 대신, 그들을 윤리적으로 단죄하는 쉬운 포퓰리즘적 해결책이 동원되었다"며 "당연히 예상되는 비판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 이해하지 못하겠단 반응을 보였다"고 돌이켰다.
더 큰 문제는, 분단 극복이야말로 '진짜 정치'라고 믿는 86에게 민생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선거 국면에선 열심히 민생을 부르짖다 정작 집권하면 민생은 뒷전에 두거나 어설프게 대응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들은 사람, 공정, 평화, 한반도, 상식, 깨어 있는, 정의, 개혁, 민주, 서민, 우리 아이들, 민족, 시민 같은 두루뭉술한 말들에 취한 채 그 속에서만 사는 것 같았다. 국회는 사회적으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를 결정하라고 만든 곳일 텐데, 정작 그런 첨예한 문제는 미루기만 했다."(8쪽)
문재인이 정치의 한가운데로 불려 나온 이유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학습의 기회를 놓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면서다.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라크전 파병, 한미 FTA 대응 등 일련의 계기를 통해 86 정치의 모순점은 일정 부분 노출됐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민주 진영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적 영역마저도 성역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모든 책임을 적폐세력에게 지움으로써 노무현 정부의 실패 지점에 대해 자기성찰을 할 기회는 사라지고, 반성은 일정하게 오도되었"던 것이다.
황 작가는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86 포퓰리즘의 양상이 크게 바뀐다고 서술한다. 민중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엘리트 세력이 기존에는 '외세 군부독재, 매판자본'이었다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부턴 '상대당(한나라당), 검찰, 언론'으로 전환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지나며 포퓰리즘의 이분법은 '외세―민중'이 아니라 '적폐―(깨어 있는)시민'으로 전환된다"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이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로 선택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노무현의 죽음에서 반적폐 포퓰리즘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누가 적폐이고 누가 적폐의 상대항으로서의 '우리', 즉 '깨어 있는 시민'인지에 대한 해석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투쟁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는, 노무현을 한 번도 배신하지 않은 순전한 피해자여야만 했다. 그렇게 노무현의 평생 친구이자 상주인 동시에,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전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이 정치의 한가운데로 불려나온다."(231쪽)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을 국정 과제 1호로 정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이 된다. 그러나 적폐 청산에 대한 지나친 갈망은 적폐 청산 외의 것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객관적인 검증을 대신한 건 동지에 대한 무작정한 믿음, 검찰개혁에 대한 조급함 등이었다. 무엇보다 '진선미의 화신'인 나에게서 확장된 '우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전제가 있었다.
반적폐 포퓰리즘에서 '시민'은 보수정당, 검찰, 언론 등 적폐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구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의 논리는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믿는 자만이 정당한 자격을 가진 '국민'이라는 논리로 더 변질된다. 조국의 무고함을 믿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국민'의 범위는 더욱 축소된다."(247쪽)
문재인 정부의 '국민'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조국 수사 책임자인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민주당으로선 환장할 결말이었다.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만일 노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과는 별개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의 과정이 있었더라면, 문재인 정부는 적어도 이렇게까지 허망한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으리라.
반성은 '내부 총질'인가
86 포퓰리즘을 극복하지 않는 한 민주당 정부는 실패를 반복할 것이라고 저자는 뜨겁게 웅변한다. 86이 정치권에서 퇴출돼야 한다는 '86 용퇴론'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썼을 때만이 효용을 가질 수 있다. 86이 등장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주당에는 이미 86 DNA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이 뿌리를 통으로 들어내지 않는 한, 86 정치인 한 둘이 직을 내려놓는다 한들 민주당은 이 내재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관이 명관' 효과로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반성 없이 지난날을 반복한다면 제2의 조국 사태, 제2의 부동산 대응 실패는 불 보듯 훤하다. 이해찬 전 대표가 말했다던 '50년 집권론'은 허무맹랑한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국민'은 대선 때마다 영리한 선택을 해왔다.
결국 해법은 반성이다. 지금이라도 지난 정부의 실패, 연이은 선거 패배의 원인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단,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요즘 민주당에서는 당을 흠집 내거나 '내부 총질'을 하면 해당행위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파다하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실정과 민주당의 모순을 지적한 황두영 작가는 해당행위자인가, 아닌가. 이것부터 논쟁을 벌여야 한다. 민주당이 50년 집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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