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하는 경찰이 사회적 약자를 지킬 수 있는가."
경찰 내 성차별·강제추행 사건의 피해자 박 아무개 경위가 사건 공론화 이후 벌어진 경찰조직 내 2차 피해와 이에 대한 조직의 방치를 지적하며 경찰 내 조직문화 개선을 요구했다.
박 경위는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0월 18일 (성차별 등 사건에 대한) 감찰 조사 결과 통지를 받고 저는 다시 한 번 무너지고 말았다"라며 "경찰청은 봐주기, 제 식구 감싸기, 시간 끌기 감찰조사를 하면서 언론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렸다"고 주장했다.
서울 성동경찰서 금호파출소에서 일어난 '경찰 내 성차별' 사건은 지난 7월 피해자인 박 경위가 공중파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16년차 경찰 박 경위는 올해 초 해당 파출소 내근직으로 배치된 후 관리반으로부터 '소장님 밥은 안 챙기느냐'는 말을 듣고 파출소장 A 소장의 점심식사에 동행해야했다. 여성경찰에게 일종의 수행원 역할을 맡기는 성차별 조치였다. 본격적인 성차별 사건은 이후로 시작됐다.
A 소장은 점심식사를 명분으로 안경점 방문이나 지역 외부행사 방문 등 사적 용무에 박 경위를 대동하기 시작했다. 업무 연관성이 없는 암벽 등반 등 취미생활을 박 경위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특히 A 소장은 친분관계에 있는 80대 지역유지 B씨와의 만남마다 박 경위를 대동했다. 이 과정에서 B씨는 박 경위에게 "파출소장 비서가 과일 깎아보라", "500만 원 주고 (박 경위를) 승진시켜 주겠다"는 등의 성차별 발언을 했고, 개인 사무실로 박 경위를 불러 강제로 끌어안는 등 박 경위를 추행했다. A 소장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박 경위에게 '개인 전화번호를 B씨에게 알려줘라', '회장님(B씨)이 승진시켜준다고 하니 빨리 와라'고 지시하는 등 사실상의 접대강요 행위를 일삼았다.
박 경위의 도움 요청을 받고 상담을 진행한 한국여성민우회 측 신혜정 활동가는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해 "4~5월경부터 박 경위가 부당한 일에 반발하며 거절하기 시작하자 A 소장은 박 경위에게 폭언을 쏟아내며 비난했고, 다른 곳으로 발령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더군다나 A 소장은 박 경위가 부당행위를 거부할 경우 다른 여성경찰을 대동하는 등 피해를 확산시켜 박 경위가 어쩔 수 없이 그의 행위에 호응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 경위는 지난 5월 15일 성동경찰서 청문감사실에 진정을 제출했지만, 이후 시작된 것은 A 소장과 다른 조직구성원들의 2차 가해였다. 박 경위는 가·피해자 분리조치를 요구했지만 '감찰결과가 나올 때까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A 소장의 2차가해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박 경위는 A 소장과 같은 장소에서 불과 1미터(m) 거리를 두고 근무해야했다. 박 경위는 "(요청 이후) 한 달 후에야 (공간분리가 아닌) 파티션을 지급 받아 자리를 가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A 소장은 박 경위의 병가 기간 동안 서내 폐쇄회로(CC)TV를 불법 열람, 동료들의 허위진술을 강요해 근무태만 등 사유로 박 경위에 대한 '역진정'을 넣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무지의 일부 동료들은 '이럴수록 너만 어려워진다', '병가 다녀와서 얼굴만 좋다', '내가 널 다른 데로 쫓아낼 거다', '소장님이 널 너무 믿었다'는 등의 2차가해 발언을 일삼았다.
박 경위는 감찰 진행사항을 여러 차례 문의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고, 서울청 감찰 조사계장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박 경위의 토로에 "우울증 약은 나도 먹는다"는 등의 폭언을 건네기도 했다. 서울경찰청의 감찰 결과는 구두 처분인 직권 경고에 그쳤다. 파출소장의 지시를 '갑질이나 강요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박 경위는 지난 7월 13일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실명으로 사건을 공론화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자 경찰 측의 태도는 급변했다. 경찰청 본청은 박 경위가 인터뷰에 나선 지 5일 만인 7월 18일 A 소장에 대한 직접 감찰에 착수했다.
박 경위는 해당 감찰에 대한 결과를 지난 18일 통보받았다. 경찰청은 A 소장의 비위 행위를 인정, 서울청에서 직접 그를 징계하라고 결정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가·피해자 간의 분리조치 △서울청 감찰부서의 부적절 대응 등 박 경위가 겪은 2차피해 등에 대해서는 비위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박 경위는 특히 "15만 명이 열람 가능한 경찰 내부 게시판에는 아직도 한 2차 가해자가 '여자가 무고했다', '(박 경위의 문제제기는) '을질' 문화다'라는 등의 2차가해성 글을 올리고 있다"라며 "(경찰 측은) 게시판 규칙은 있지만 규칙위반 시 징계 등 기준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으로 알고 있다. 사실상 어떤 대책도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이날 기자회견을 함께 주관한 한국여성민우회, 경찰직장협의회 및 22개 여성·노동 단체들은 △서울경찰청의 성차별 행위자 징계절차 및 피해자 피해회복 조치에 대한 점검 △2차피해를 야기한 감찰부서 관계자와 동료들의 언행에 대한 재조사 △파티션 지급 등 형식적 분리조치로 2차피해가 지속되도록 방치했던 서울 성동서에 대한 재조사 △경찰 내 여경에 대한 성차별·성희롱 사건에 대한 적극 기획 감찰 및 재발방지 대책 수립 등을 경찰청에 촉구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특히 "본 사건은 '갑질'로 이름 붙여졌지만 정확하게는 '여성이기에 발생한' 성차별적 괴롭힘에 해당한다"라며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면 비서 역할 수행이나 접대 등의 요구를 했겠느냐" 되물었다. 박 경위 또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여경들의 경우) 순경 때부터 이런 성차별적 경험을 많이 겪는다. 저 또한 여성단체와의 상담 이전엔 이게 성차별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여성경찰에 대한 성역할 강요 등 경찰조직 내 만연한 성차별 문화가 이 같은 성차별적 괴롭힘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경찰청이 발표한 '2020 성희롱 고충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찰청 소속 여성 직원 3명 중 1명은 '경찰 내부에서 성희롱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여성경찰의 55.5%가 '주요 핵심업무는 특정 성별이 담당한다'고 응답했고 43.6%가 '여성 직원과 일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응답했다. 응답자 55%는 '성차별이나 성희롱 고충을 제기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다'고, 27.3%는 '차 심부름 등을 여성 직원에게 시키는 경향이 있다'라고 응답했다.
민우회 측은 "여전히 경찰 조직 안에서 '여자경찰'은 성적 대상, 혹은 핵심 업무에서 배제된 대상, 동등하게 일을 함께 하기에는 불편한 대상이다"라며 "여성경찰은 스스로 조직 내에서 배제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조직 내의 위태로운 위치 때문에 조직의 눈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문제제기조차 어려운 것인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은 지난 2018년 성평등정책담당관실을 신설해 조직 내 왜곡된 젠더 감수성 등을 개선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23년 성차별 사건을 경험한 박 경위는 "(사건 당시) 이용할 수 있는 성고충 매뉴얼이나 창구 등은 하나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배진경 대표는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해당 담당관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박 경위는 현재 A 소장의 직권남용 혐의, 지역유지 B씨에 대한 강제추행 혐의 등에 대한 고소 건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경찰 내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사건 이후) 풀타임 근무를 하지 못하고 시간제로 근무하며 상담을 받고 있다"고 근황을 알렸다.
박 경위 사건에 연대하고 있는 전국경찰직장협의회의 장택수 대외협력국장은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해 "협의회는 앞으로 경찰청에서 내린 감찰조사결과와 관련, 더욱 더 경찰청이 제대로 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해 갈 것"이라며 "박 경위의 슬픔, 피해 등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도록 협의회가 최대한 노력해서 모든 걸 복원시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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