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시민적 공화주의
현대 공화주의는 크게 두 유형의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프리즘으로 다가가는 신로마 공화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마이클 샌델이 미국 건국의 공화주의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시민적 공화주의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놀랍게도 기원전 509년에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등장했다. 주도 권력은 귀족인 원로원에게 있었지만, 평민들이 집단적 저항을 통해 자력으로 일정한 자유를 이끌어냈고, 그리스로부터 영향 받은 사상적 지혜도 발현되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패망한 그리스의 현인으로 로마에 포로로 잡혀와 귀족 가문의 교사가 된 폴리비오스는 탄식과 경탄을 금치 못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민주주의의 그리스가 급격히 몰락한 반면, 공화정의 로마는 120년 가까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였는데, 그 위력이 지혜와 현실적 힘의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실용성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로마는 군주제 요소인 집정관(또는 독재관)을 통해 지도력을, 귀족제 요소인 원로원을 통해 운영의 지혜를, 그리고 민주제 요소인 (평)민회를 두어 시민의 자유를 나름 보호하는 융합 제도를 갖춘 공화정을 탄생시킨 것이다.
로마 공화정이 야심을 품은 카이사르로 인해 종식되어 황제 통치로 넘어간 것은 일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16세기 초에 남긴 <로마서 논고>를 통해 현대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신로마 공화주의는 공화정이 실용적 혼합 정체로서 강고하다는 것이고, 그 핵심으로 만인이 법 이외에 누구의 지배도 허용하지 않고 누리는 자유, 즉 비지배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한다.
현대에는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주창하는 또 하나의 공화주의가 있는데, 미국 건국의 주춧돌인 공화주의에서 직접 기인한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은 건국의 이념을 공화주의에서 찾았고, 이에 부응하여 제임스 매디슨은 1787년에 헌법을 기초하였다. 매디슨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삼아 집정관에 해당하는 행정부의 대통령, 원로원에 비견할 입법부 의회, 그리고 사법부의 삼권을 두면서 견제를 통해 균형적 조화에 이를 수 있도록 제도를 구성했다. 사회제도 곳곳에 들어갈 내용으로서 아메리카합중국의 기본 정신을 담아내고자 하였는데, 가깝게는 자유를 찾아 온 청교도의 정신, 멀리는 그리스의 덕의 윤리까지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힘입어 민주주의가 피어났다.
샌델은 1996년에 저서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공화주의를 적극 제시하고 있는데, 자유주의와 다름을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와 달리 자유주의적 견해는 자유를 자치에 대한 제한으로 정의한다. 나는 다수가 결정한 것으로부터 면제를 보장받는 권리들의 소유자인 한에서 자유롭다. 반면에 공화주의적 견해는 자유를 자치의 결과로 본다." 부연하자면 "공화주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자유롭다는 것은 자체의 운명을 지배하는 정치 공동체를 다스리는 데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치는 자체의 운명을 지배하는 정치 공동체들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공동체와 충분히 동일시하는 시민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참여에 필요한 덕, 독립성, 공유된 인식을 갖춘 시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공화주의 정치의 주된 목적이다." 신로마 공화주의가 비지배적 자유를 우선시하면서 시민의 덕을 그 수단으로 삼는 데 비해, 샌델의 시민적 공화주의는 자유와 시민의 미덕, 자치, 공동선의 추구가 서로 결속되어 동일한 가치 선상에 핵심으로 놓여 있다고 본다.
파시즘은 언제, 어떻게 나타났나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던 무렵의 유럽은 극도의 혼란이 여전한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폐해가 극에 달해 민중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 시기 프랑스의 조르주 소렐은 유럽 사회가 직면한 질병의 원천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이고 민주주의는 혁명의 장애이며, 대안으로 검토되던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역시 현실 구제에 무능력할 뿐이라고 외쳤는데, 여기게 전적으로 공감한 이가 바로 무솔리니였다. 그는 청년 때 사회주의자였지만, 유럽의 강국 가운데 최약체인 이탈리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민족주의를 덥석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로 이탈리아 사회당은 1919년에 처음 의회 제1당의 지위에 올랐지만 무기력함만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결과 1922년 10월에 무솔리니가 왕에 의해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는 현실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당시 독일도 유사했다. 독일 사민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912년에 의회 제1당(35% 득표)으로 부상하였지만 역시 정책적 무능을 드러내면서 마침내 1932년 의회 제1당의 자리를 잃으면서 그 자리를 신생 나치당(37.3% 득표)에게 넘겨줌으로써 히틀러의 부상을 (아이러니하게 도운) 조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어 '묶는다(fasciare)'에서 발생한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를 분리해서 부추기는 원자론적 자유주의(자본주의) 및 제반 사회계급의 갈등을 조장하는 계급 혁명의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민족정서에 호소하여 강고한 (배타적) 민족주의로 결집을 이뤄내고 엘리트의 주도 속에 선동적 구호(전형적으로 "믿으라, 복종하라, 투쟁하라"는 무솔리니의 구호)를 수단으로 위대한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유형이다. 그리고 독일서 출현한 나치즘은 파시즘에 인종(차별)주의가 결합한 더욱 기이한 양태이다.
서유럽에서 극우와 극좌의 발호, 한국은?
파시즘은 전체주의에 속하는 우파 유형으로 좌파 전체주의와 맞닿아 엄청난 비극과 해악을 초래했다. 오늘날에도 그것이 과거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변모된 양상으로 다시 고개를 치켜들 소지가 없지 않다. 서유럽에서의 극우와 극좌의 발호가 전조이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그런 조짐이 엿보인다는 데 있다.
좋은 사회를 희구하는 공화주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그 정반대인 나쁜 사회로 이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노예제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의 집단이익이 충돌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더글러스는 노예제의 도덕성에 관한 집단적 의견이 불일치하므로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얼만 전 창당된 공화당의 신예 링컨은 공화주의에 따라 노예제의 도덕성 사안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외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남북전쟁을 대가로 치렀으며, 마침내 노예제를 종식시켰다. 배타적인 우월적 민족주의는 다른 집단과 첨예한 갈등을 야기하고 이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이나 인종, 소수 집단을 희생시키고야 만다. 뿐만 아니라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옭죄고, 권위주의로 자(율적 통)치에 굴종을 강요하며, 시민의 덕을 황폐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시민적 공화주의의 적이다.
우리 사회에도 파시즘을 잉태한 요인이나 전체주의 망령이 정치권 곳곳서 드리워져 있음은 자못 우려스럽다. 윤석열 정부의 우파는 이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검찰을 등에 업은 채 자기편 이데올로기의 전사들을 전면에 배치하여 상대편의 과오와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드러내는 공격에만 열중하는 형세이다. 특히 뉴라이트의 배타적 행태는 언제든 파시즘으로 미끄럼을 탈 소지가 있다. 좌파의 모습도 국민의 눈에는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민주당의 당 대표는 범죄 혐의로 국민이 의혹을 받고 있는 만큼 검찰 소환에 당당히 응하여 사법부의 공정한 판결을 기다리면 될 터인데, 취하는 행보마다 도둑 제발 저린 격으로 비춰지니 믿어주고 싶어도 믿기 어려운 지경이다. 거기다 당내 수박을 찾아 응징하겠다는 개(혁의)딸은 민주주의의 암적 요소로서 파시스트 친위대를 연상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화주의의 형성적 기획을 통해 덕을 갖춘 시민이 늘어나고 또 그런 자 가운데 국정을 도모할 분들이 출현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는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라고 본다.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강치원 공공선 거버넌스 원장, 전 강원대 교수가 썼습니다)
출산율, 자살율, 빈곤율, 조세부담율, 그리고 GDP 대비 가계부채 증가율....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들이다.
과연 우리는 헌법 조문이 말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인간 불평등을 전제로 소수가 지배하는 엘리트 집단 독재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행령 정치로 인해 하루도 빠짐없이 대의 민주주의가 무참히 파괴되는 국회의 무력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다른 하나, 극단적 반공주의의 횡행이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언급 없이 오늘도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지고의 가치로 강조하는 위정자들이 설치고 있다. 사회와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은 자유란 가진 자의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는 지도자는 드물다. 자유주의의 개념과 그 역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신자유주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사회적 자유주의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어 그 폐해가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한 축인 사회민주주의가 빨갱이로 매도되고 발붙이지 못하는 후진성을 언제쯤 극복할 수 있을까.
또 다른 하나, 배타적 국수주의와 국가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정부 요직에 중용되어 정치를 좌우하고 있다. 언론 등 곳곳에서 민주적 다양성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데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해묵은 냉전시대의 가치와 이념, 그리고 공산 전체주의가 소환되고 있다. 과거 문제에 집착하고 들쑤시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한 비전과 가치철학이 부재하기 때문 아닌가. 신냉전 체제를 향한 외교정책, 전쟁불사론 등은 긴장갈등 조장으로 서민경제 등 내치의 무능을 덮고 국민적 관심을 외치로 돌리고자 함에서 비롯된 것인가. 냉전시대 동서 대결의 분기점이 독일이었다면, '한미일 대 북중러' 신냉전 체제의 분기점은 한반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를 경계하는 실리, 균형, 평화 외교론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마지막으로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 주장과 선동에 열광적, 맹목적 지지가 넘쳐난다. 장관은 잘하든 못하든 스타가 되어야 한다! 이게 선동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30% 내외 콘크리트 지지율을 믿고 떠드는 팬덤정치에서 파시즘의 불길한 조짐을 본다면 지나친 기우인가.
이런 한국 사회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고자 학문의 실천과 공론화 자리를 기획했다. 내년 5월 이틀간에 걸쳐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원탁 학술대회를 열고자 한다. <공공선 거버넌스>, <원탁토론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하고 <프레시안>이 후원한다. 신학과 정치, 사회 과학, 문화, 전쟁, 국제정치, 그리고 우리 역사 등 여섯 개 분과로 나뉘어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 31명이 참여한다. 첫날 독일 보쿰대학교 신학부 트라우고트 예니헨 교수의 기조강연은 동시통역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학술대회를 앞두고 내년 4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8-10시 줌(Zoom)을 통해 비대면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며, 강의 내용의 일부를 기고문 형식으로 <프레시안>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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