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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천사님이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르포] 40년간 한센인 위해 봉사한 마가렛 여사 고흥 분향소 추모객 북적

"살아계신 천사님,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5일 오후 전남 고흥군 도양읍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

고흥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봉사했던 '소록도 천사' 마가렛 피사렉님이 지난달 29일 선종한 가운데 고흥군이 마련한 기념관 앞에는 피사렉 여사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흥군 도양읍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 앞 마가렛 피사렉의 분향소에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프레시안(문경화)

저마다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여사의 영정앞에 올려놓고 인사를 마친 추모객들은 방명록에 그녀를 기리는 글들을 남겨놨다.

"살아계신 천사님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소록도의 천사, 마가렛 피사렉의 명복을 빌며 '행복의 완성은 나눔이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셨던 숭고한 삶,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추모객들 사이에 승복을 입은 한 비구니의 추모하는 모습이 눈이 띄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추모를 마치고 나온 스님은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와 어떤 인연이 있냐"는 질문에 슬픔을 감추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 주지 서림 스님이라 밝힌 그는 "우리 형아였다. 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몸 한뜻이었다"며 "형님도 아니고 형아라고 불릴 만큼 친한 사이로 종교를 구분하지 않고 친교를 나눈 사이였다"고 눈물을 간신히 참아낸다.

이어 "내 나이가 더 어리지만 수행이 더 높다며 서로 형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수녀로 불리는 것을 싫어해 큰 할매 작은 할매라 부르라고 했다"며 "형아를 만나러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형아는 향수병으로 힘들어했다. 소록도가 제2의 고향인 그녀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에 힘들어했다"고 회상했다.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 주지 서림스님이 분향소 앞에서 한참을 추모하고 있다. ⓒ프레시안(문경화)

마가렛 여사는 흔히 수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수녀가 아니라 평신도 재속회 소속이었다.

폴란드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국립 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전남 소록도에서 1966년부터 39년간 한센 환자들을 돌보다, 2005년 건강이 나빠지자 '주변에 부담을 주기 싫다'는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함께 봉사했던 동료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와 함께 조용히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이후 치매를 앓았으며 지난달 29일 대퇴골 골절 수술 중 심장마비로 향년 88세로 생을 마쳤다.

온전히 베푸는 삶을 살았던 마가렛 여사는 주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받는 것은 잘 못했고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시신마저 의대에 기증했다.

서림 스님은 "미감아(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 50명을 키운 마가렛은 아이 하나가 배가 불룩 튀어나와 죽는 모습을 봤다"며 "그 아이에 몸에서 커다란 해충이 나온 모습을 보고 한참을 울더니 인도에서 교육받았던 박사님께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배를 곪지 않게 나의 젖이라도 물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각 단체들에게 우유와 치료 약을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며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눔연수원 한편에는 그녀들을 추억하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프레시안(문경화)

1960~1970년대 대한민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고 그 당시 소록도에도 병원은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인 한센인들의 삶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고국에 호소하며 많은 지원을 이끌어냈고, 소록도 안에 가장 시급한 영아원과 결핵병동, 정신 병동, 맹인 병동, 목욕탕 등의 건물을 세워 한센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회복지사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가렛의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의대 교수였고 자연스레 가족들은 소록도에 있는 마가렛에게 많은 의약품을 지원해 이것으로 많은 한센인들이 완치될 수 있었다.

한센병을 앓았던 소록도 주민 강창석씨(78)는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떠난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라며 "한센병을 앓았던 나는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심해 힘들어했는데 그 두 분은 인격적으로 자식 돌보듯 환자를 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센병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마스크, 이중 장갑으로 완전히 무장하고 진료를 한 의료진과 그녀들은 달랐다"며 "1982년 쯤 내 발에 피고름이 고여 치료를 받던 중 마리안느 얼굴에 피고름이 튀자 주변에선 전염이 될까 두려워 떨었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태연히 웃고만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나 또한 그녀들에게 전염이 될까 걱정이 되어 왜 웃으시냐? 어서 소독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라고 물었지만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거즈로 얼굴을 쓱 닦고는 담담하게 상처 치료를 계속했다"고 전했다.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눔연수원 한쪽 벽에 걸린 마가렛이 환자를 맨손으로 치료하는 모습이 전시되어있다. ⓒ프레시안(문경화)

늘 타인의 눈빛에서 전염의 공포를 보았던 한센인들은 환자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맨손으로 만지고 몸 구석구석을 직접 소독해 주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진심 어린 치료에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두 간호사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병원에 도착해 우유를 탈 물을 끓였고, 한센인들에게 우유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한센인들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화를 나누고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두었다가 그들이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을 먼저 챙겼다.

그녀들의 적극적인 치료는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트렸으며, 헌신적인 봉사는 전국에서 의료봉사단과 지원봉사자들이 소록도를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마가렛의 사랑은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소록도를 치유의 섬, 희망의 섬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한 가치로 남을 것이다.

그녀의 장례식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요양원 내 경당에서 현지시각 7일 오후 3시30분에 열린다.

정부는 한센인들의 간호와 복지 향상에 헌신한 공을 기려 마가렛과 마리안느 간호사에게 1972년 국민훈장, 1983년 대통령표창,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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