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 성인 입양인(1961년생)이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사건 번호 2391번이며, 홀트 고아원(현 홀트아동복지회)을 통해 입양됐습니다. 입양 당시인 1965년 저는 4살이었고 이 경험을 헤쳐나가기 위해 평생동안 고군분투했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나는 한국 정부가 나와 수천 명의 다른 입양 아동들의 인권을 어떻게 침해했는지 깨닫고 놀랐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유색인종(POC), 여성으로 성공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나는 큰 고통을 겪었고, 어쩌면 불필요한 고통을 겪었다고 믿습니다.
우리 입양인들은 납치돼 다른 나라로 입양될 수 있도록 '서류 고아'가 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 있는 한국전쟁박물관(2017)에 따르면, 한국은 당시 해외입양을 통해 1인당 500달러를 지급받아 혜택을 입었고, 이 돈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서는데 엄청난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입양은 점점 돈벌이 수단으로 발전했습니다. 입양 절차가 언제 인도주의적이고 기독교적인 행위에서 세속적이고 불법적인 이윤 창출 행위로 바뀌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 한국의 거리에서 납치된 것이 확인된다면, 제 정체성이 침해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국 문화를 거부당했고, 인종주의에 대한 대응도 불가능했으며, 미국 중부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WASP) 문화에 동화되는 과정을 견뎌야 했습니다. 입양 뒤에 숨은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내 전망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입양에 대한) 자기 결정과 동의는 제가 어린 나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 거부되었습니다. 제가 버림받거나 자발적으로 포기되지 않고 납치되었다면 적어도 제 친생모는 동의를 거부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입양가정에 대한 교육이 철저했다고 더이상 확신하지 못합니다. 제 양부모는 훌륭한 기독교인이었던 젊은 부부로 묘사됐습니다. 이는 제가 입양될 당시 홀트 직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양부모님은 "불쌍한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칭찬을 들었습니다.
홀트는 제가 '어머니의 작은 도우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입양된 남동생을 보살폈고, 10대 시절에는 청소와 요리, 빵 굽는 일 등을 도맡았습니다. 최근 저는 제 서류에서 입양 직후 홀트에서 양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홀트는 양부모가 입양할 10-12세 소녀를 찾을 수 없어서 미안해했습니다. 양부모님이 다 자란 소녀를 요구한 진짜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만 할 뿐입니다.
저는 제 아들에게 체벌을 가한 것이 부끄럽고 그가 용서해줘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가 자라면서 겪은 일을 되풀이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사소한 잘못에도 "나무 주걱"과 같은 다양한 물건으로 매를 맞았습니다.
나는 변화의 격동 속에서 특별한 보살핌이나 제대로된 양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나의 양어머니는 (입양 후) 몇 년 뒤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양어머니는 제가 스스로 적응하고 처음부터 "미국인"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나이에 공립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정서적 지지를 받았다면 제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저와 비슷한 모습인 생물학적 가족이 있을지 생각하면 어리둥절합니다. 저를 몇 년 전에 서울, 한국으로 가도록 격려한 것은 제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여행 동안 느낀 모호한 감정에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이 여행 중 만난 한국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과 유대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젊은 한국 성인 입양인들이 가지는 모국인으로서의 감정을 갖기 힘들었습니다.
제 정체성에는 한국 여성이라는 감정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다양한 정체성 중 매우 미약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제 양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서, 저는 스코틀랜드의 음식, 의복, 언어 등을 모두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열린 문화 음식 축제에서 경험한 부끄러운 감정을 기억합니다. 저는 양할머니가 만든 스코틀랜드 쇼트브레드를 가져갔습니다. 속으로 김치를 가져갔다면 훨씬 나빴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의뢰하는 과정을 거치고 한국 언론에 글을 쓰는 것은 제 입양 과정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생각, 감정, 결정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덜어졌습니다. 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정당화되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조사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6월 8일 추가로 237명에 대한 조사 개시 입장을 밝혔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만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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