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은 '공산전체주의'가 화제다. 대통령은 공산 세력이 나라를 흔든다며 절규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항일독립운동 영웅이 갑자기 사상재판을 당한다. 덕분에 미국의 매카시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가 마치 오늘밤 TV 뉴스 화면인 양 실감나게 다가온다.
2023년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20세기의 긴 그림자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다른 나라들에서는 불과 몇 달 전에 끝난 글로벌 팬데믹에서 교훈을 끌어내려는 논의가 한창이다. 그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돌봄(care)'이다. 최근까지, 어린이나 노인처럼 홀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에 쏟는 특별한 관심이나 대우를 뜻하던 말이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지금은 이 말이 훨씬 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한층 더 근본적인 고민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우리 모두는 실은 '돌봄'을 간절히 바라는 존재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어린이나 노인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돌봐야 할 운명이다. '돌봄' 논의는 이 깨달음으로부터 우리 삶과 사회의 새로운 원칙과 가치, 지향을 뽑아내려는 시도다.
이와 관련한 꽤 묵직한 분석과 제안을 담은 저작들도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캐나다 법학자 제니퍼 네델스키(Jennifer Nedelsky)와 사회과학자 톰 맬리슨(Tom Malleson)이 함께 쓰고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펴낸 책이다. 불과 몇 달 전에 나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은 없는 이 책의 부제는 '돌봄 선언(Care Manifesto)'이다. 그런데 제목이 좀 당황스럽다. 한국어로 옮기면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Part-Time for All)'다. 모두가 비정규직이 되자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복합위기의 중요한 한 가닥, 돌봄위기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는 우선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돌봄 문제의 심각성을 짚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공저자들이 돌봄 문제의 첫 번째 측면으로 드는 것은 가족이 짊어진 무거운 짐이다. 자본주의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출현해야 한다. 즉, 노동력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은 이 임무를 노동자 가족에게 전가한다. 비록 국가가 재생산 활동을 일정 부분 책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개별 가족의 몫이다.
가족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탓에 각 가정이 받는 압박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과거 농촌 대가족 질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산업화 초기에 자본은 돌봄 활동이 전적으로 가족의 몫이라는 상식을 정착시킨다. 그러나 산업화가 무르익으면 어느 사회든 핵가족 중심으로 바뀌며, 그러면 대개 여성인 각 가족의 주된 돌봄 제공자 한 사람이 떠맡아야 할 부담이 대폭 늘어난다. 다시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더해져 부모가 모두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맞벌이 가족이 늘어나면, 인류 역사 수십만 년 동안 익숙했던 돌봄 활동이 전에 없던 고통으로 느껴지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논의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스트레스는 압도적으로 한쪽 성별, 즉 여성에게 몰린다. 주로 젠더에 바탕을 둔 불평등, 이것이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가 지적하는 돌봄 문제의 두 번째 측면이다. 자본주의 가족 형태의 최신형인 맞벌이 부부에서 여성은 이중의 고통을 당한다. 일터에서는 주로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돌봄 활동의 대부분을 책임진다. 실은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가족 내 주된 돌봄 제공자라는 데 있다. 세상은 어머니를 떠받들지만, 어머니가 됐거나 될 수많은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다.
가족 내부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기업이나 국가가 담당하는 돌봄 활동에서도 일선 노동자는 대개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이 맡는 이런 돌봄 노동은 일방적으로 저숙련 노동이라 평가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임금을 낮게 책정하고 고용 형태도 불안정하게 만들며 지위도 낮춰 본다. 여성과 돌봄 노동 사이의 이러한 연관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젠더 불평등이 점차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굳어진다.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는 이런 측면들 외에도 돌봄 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더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껏 이야기한 내용만으로도 우리는 이 문제가 현대 사회에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돌봄위기'는 한국어에서는 아직 낯선 단어이지만, 실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익숙한 위기를 좀 달리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구위기, 즉 저출생 문제다. 21세기 벽두부터 한국의 출생률은 계속 가파르게 떨어지기만 했다. 2000년대 초라는 시점은 한국의 가족 형태가 급속히 바뀌는 와중에 외환위기 직후 신자유주의화의 충격이 더해진 시기였다. 돌봄 부담의 유례없는 증가에 각 신생 가족은 자녀 수를 최대한 줄이는 선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제 와서는 한국 자본주의만의 고유한 문화로까지 굳어지고 있다.
노인 인구 비중이 계속 늘어난다는 현대 사회의 철칙에다 한국의 이런 특별함을 더하면, 결국 돌봄위기의 또 다른 표출 형태와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초고령화가 그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몇 년만 지나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그리고 불과 10년도 안 남은 2030년이 되면 노령화 정도가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다시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한국은 일본과 나란히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3을 넘는 지경에 이른다.
이미 개인과 가족에 떠넘겨진 돌봄 부담 때문에 초저출생을 선택한 사회에서, 더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할 노인 인구가 세 명 중 한 명으로까지 늘어난다면, 과연 그때 사회가 받는 압박이 어느 정도일까? 지금도 다들 '각자도생'을 말하며 한탄하는데,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뒤에는 도대체 어떠한 광경이 펼쳐질 것인가? 자본주의가 '비용'으로만 치부할 인구가 그 정도로 늘어나 있을 상황에서 우리는 '비용'이 아닌 '인간'이라는 틀로 이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런 점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돌봄 문제는 복합위기를 이루는 여러 가닥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긴급한 위기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 같은 책에 가장 귀 기울여야 할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다.
'주 20시간 돌봄-30시간 노동'의 보편적 돌봄사회를 향해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는 돌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국가가 예외 없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원칙과 지향을 제시한다. 이 책은 주석까지 포함해 350여 쪽이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을 할애하며 돌봄 문제를 해결할 정책의 여러 측면을 상세하고 꼼꼼하게 짚는다. 이 작은 지면에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장 뼈대가 되는 주장만 추려 보면, 일단 두 저자가 추구하는 방향은 보편적 돌봄사회라 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사회이며, 이런 돌봄 활동이 핵심 가치이자 원칙이 되는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돌봄 경험이 개인적-집단적 윤리의 토대가 되며, 따라서 문화 역시 돌봄 가치를 중심으로 짜인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열정이 경제적 이익 추구를 향한다면,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가 그리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돌보는 일이 열정의 주된 출구가 된다.
그러자면 우선 시민들의 돌봄 활동을 뒷받침할 공적인 돌봄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두 저자는 시민들의 돌봄 활동 참여에 대한 강조가 일종의 돌봄 서비스 사유화-시장화로 읽히는 것을 경계한다. 시민들이 더 많은 시간을 돌봄 활동에 투여할 수 있으려면, "경제적 안정성 보장, 비싸지 않은 주거, 생활임금, 질 좋은 보편적 아동 돌봄 서비스, 최상의 노인 요양 설비 등"(p. 16)이 구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보편적 기본서비스'론(안나 쿠트, 앤드루 퍼시, <기본소득을 넘어 보편적 기본서비스로!>, 김은경 옮김, 클라우드나인, 2021)이 주장하는 수준으로 공적 복지가 확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는 아무리 공적 돌봄 서비스를 확장해도 여전히 돌봄의 사각지대가 남을 것이라 본다. 그만큼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인간 활동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하다. 이 빈 틈은 가족과 여러 공동체가 메울 수밖에 없다. 이 영역이 바로 모든 시민의 자발적 돌봄 활동이 전개되어야 할 무대다.
두 저자는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일주일에 20시간-25시간을 돌봄 활동에 보내자고 제안한다. 그 시간을 자기 가족에 투여할지, 아니면 다른 친지 공동체나 지역 공동체에 투여할지, 아예 가족과 여러 공동체에서 돌봄 활동을 병행할지는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아무튼 공적 돌봄 서비스 확충에 더해 이렇게 1인당 주 20시간 이상 돌봄 활동을 하면, 한 사회의 돌봄활동시간 총량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누구나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무슨 시간이 더 있어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을 돌봄 활동에 쏟는다는 말인가? 맞벌이 부부가 일반적 가족 형태가 될 정도로 다들 먹고사느라 바쁜 형편인데, 어떻게 주 20시간이나 뽑아낼 수 있겠는가? 관청 표어나 전문가 토론 주제로 흔히 듣는 '일-가족 균형' 정도로 과연 이런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까?
두 저자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제안한다. 모든 이의 노동시간을 주 30시간 이하로 단축하자. 모두가 일주일에 10시간에서 30시간까지만 일하자. 이 정도로 노동시간이 단축된다면, 모든 일자리는 현재와 같은 전일 근무제일 수 없게 된다. 모두가 다 시간제(파트타임) 일자리가 된다. 그리하여 모든 노동자가 시간제 노동자가 되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시간제 노동자가 된다고 하여 현재 한국 자본주의에서처럼 소득 수준이나 고용 안정성이 추락해서는 절대 안 된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라 급여가 일정하게 감소한다고 하더라도, 줄어든 노동시간에 정확히 비례하여 줄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줄어든 부분은 다른 사회적 제도들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두 저자는 "보편적 기본서비스, 보편적 기본소득, 일자리 보장제, 혹은 이 모두의 특정한 혼합"(p. 17)이라는 다양한 정책 대안들이 있다고 제시한다.
이런 정책 대안들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아무래도 현존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크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는 이런 경제 구조 개혁 방안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런 대안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순진한 입장을 취한다고 평할 수는 없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맬리슨은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별도 저작 <오큐파이 운동 이후: 21세기를 위한 경제민주주의(After Occupy: Economic Democracy for the 21st Century)>(2014년), <불평등에 맞서: 슈퍼리치를 없애야 할 현실적, 윤리적 이유(Against Inequality: The Practical and Ethical Case for Abolishing the Superrich)>(2023년) 등에서 바로 그 방안을 제시한다.
기후재난시대 인간사회의 새로운 열정의 출구, 돌봄
'주 20시간(돌봄)-주 30시간(노동)'의 보편적 돌봄사회. 또 하나의 공상적 유토피아일 뿐일까. 노동시간 단축은커녕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더욱더 늘리려고 혈안이 된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일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초고령화와 이에 따른 돌봄대란을 맞고 있는 한국만큼 이러한 대전환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또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한국 사회가 '자살'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따라야 할 혁명의 방향은 아닐까.
게다가 이는 기후재난이 지속될 시대, 그래서 생태 전환을 추구해야만 할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처방이기도 하다. 기후위기의 전개 속도를 늦추고 기후재난의 규모를 완화하기 위해 우리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지만, 지금처럼 자본-국가의 축적 열망에 사회의 다른 모든 부분이 기꺼이 동참하는 상황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다.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길 바라고 그 활동에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한, 단위당 탄소배출량을 줄여봐야 별 소용이 없다. 배출총량은 계속 늘어나기만 할 뿐이다.
인간 사회가 열정을 쏟는 방향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더 많은 부를 좇아 달려가는 무리에 휩쓸리는 것 말고 다른 열정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서로를 돌보고 자연을 돌보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돌보는 활동이야말로 그 가장 유력한 후보다.
흔히, 노동시간을 줄이고 난 다음의 대안을 대라면 '여행'을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자기 집 뒤뜰 말고 답을 찾을 다른 곳이 없음을 알아차리려고 모두가 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속 주인공마냥 세상 곳곳을 여행할 필요는 없다. 정작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들의 우주는 항상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역사적 계몽기 이후 지금껏 계속되는 방황의 끝에서 인류가 돌아간 곳이 결국은 <모두가 시간제로 일하자>가 가리키는 방향인 '보편적 돌봄사회'라면, 이것도 이 우주 안에서 썩 괜찮은 이야기 한 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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