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립외교원 발족 60주년 행사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외교의 이념과 가치 지향점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외교 노선의 모호성은 가치와 철학의 부재를 뜻한다. 상대에게 예측 가능성을 주지 못하는 외교는 신뢰도, 국익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담긴 내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역사는 어느 나라든 외교 지고의 목표는 이념과 가치라기보다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고, 번영을 기할 수 있는 대외적인 여건을 조성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념과 가치 지향점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외교에 대해 도덕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뜻이다. 개인은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이 맞으나 국제 사회에서 국가는 그럴 수 없고 그렇게 하는 경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파마스톤 총리는 “우리에겐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구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영원하고 영구하며, 그 이익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라고 하였다. 현재와 같이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시기에는 더욱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현 정부는 현재로서는 미국 및 일본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악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판단에서인지 현 정부는 이미 지난해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폐지하였다. 노태우 정부가 1990년대에 추진하여 한국 외교의 지평과 한국인들의 경제활동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그간 보수 및 진보 정부 모두가 계승하였던 북방정책을 무위로 돌리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장치로서 올해 70주년이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더하여 올해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이 있다. 이번 선언에 따르면 한미 양국은 북한이 핵 공격을 하는 경우 즉각 정상 간 협의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포함해 동맹의 모든 전력을 사용해 신속하게 대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확장억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한미 핵 협의 그룹을 설치키로 하였다. 일본과는 이미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지난 3월 한일정상회담 결과 실질적으로 완전히 복구되었다. 한국은 또한 작년 5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도 가입하였다. 한국 입장에서 한국 자신을 위해 더 추가할 것이 있는가?
그런데 이번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유사시 한미 간 협의에 일본의 참여가 제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미일 연례 군사훈련도 실시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한미일의 안보 협력 제도화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한반도 상황 관련 한미 간 협의에 일본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미국과 일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반면에 한국은 ‘외교의 선명성’을 보여주었을 뿐이고 총체적인 안보 실익의 관점에서 얻은 것은 없고 오히려 한국의 안보에 대해 일본의 개입 가능성이라는 잠재적인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더욱이 이번 회담의 결과 러시아와 중국에는 한국이 사실상 낮은 단계의 한미일 동맹 형성에 동의한 것으로 비치게 된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현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를 비판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외교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였는데 그 정도가 미국 측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회의론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 안보의 기축을 흔드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운명공동체’까지 거론하였는데 중국으로부터 얻은 것은 없고 중국은 한국을 더욱 가볍게 대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한 태도를 보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현실을 무시한 반일 선동을 오히려 부추겼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립서비스만 할 뿐이고 미국만큼은 아닐지라도 대중국 관계에서 지렛대가 될 수 있는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러 관계를 등한시하였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미국을 서운하게 하지 말고 중국에 휘둘리지 말 것이며 일본을 너무 미워하지 말고 러시아를 경시하지 말라'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가 앞선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 잡아주길 기대하였다. 그런데 비정상의 정상화를 넘어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이제는 미국과 ‘운명공동체’를 추구하는 것 같은데 한미 관계가 과연 윤 대통령이 주장하듯이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정의로운(?) 동맹"이 될 수 있을까? 또한, 대일 외교는 국민적 동의를 얻는 데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러시아가 우리에게 무슨 적대 행위를 하였다고 대러 관계를 이토록 방치하고 있는가?
현 정부의 외교정책 입안자들이 국제정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어떠한 외교정책도 국제정세에 대한 냉철한 평가에 기초하지 않는 경우 국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1년 반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분쟁인가? 서방 언론과 이를 베끼는 국내 매체들이 보도하듯이 우크라이나가 몇몇 전투에서 성과를 내었다고 전세가 바뀌었나? 서방이 기대하듯이 러시아가 경제가 붕괴되고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었는가? 이번 전쟁 때문에 러시아와 유럽 사이 경제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그간 유럽국가들의 번영이 사실은 러시아가 저렴하게 제공하는 원유와 가스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현재 유럽국가들의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미국 등 서방을 외면하고 있다. 최근 중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일어난 친러 쿠데타 이후 아프리카에 불고 있는 반서방 물결에 대해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이 그간 중동 지역에서 역내 국가들 사이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면서 전략적 이익을 취해 왔으나 최근 중국의 중재로 앙숙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화해하였고 미국이 이란만큼이나 고립시켰던 시리아도 아랍연맹이 포용하게 되자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일부에서 '신냉전'의 도래를 말하는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립은 이념과 가치관의 대립이 아니라 패권을 유지하려는 쪽과 이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쪽 사이 갈등이요 대립이다. 어느 쪽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어리석다. 한국처럼 원천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수출을 늘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는데 국제정세가 대결로 치달아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신냉전'의 도래는 세계 경제의 블록화를 의미하며 이는 해외시장에 의존하여야만 하는 한국 같은 나라에는 수출시장의 축소와 해외로부터 원자재 수급이 어려워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신냉전’에 가세하기보다는 ‘신냉전’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된다. 브릭스(BRICS)는 경제규모가 이미 G7을 추월하였으며 최근 남아공 정상회의에서 6개국(사우디아라비아, UAE, 아르헨티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이 합류하였고 그밖에 20여 개국이 가입 신청을 내는 등 세를 점점 불리고 있다. 미국은 왜 중국에 대해 탈동조화(decoupling)가 아니라 위험회피(derisking)를 추구할 뿐이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나? 그간 미국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하여 이른바 ‘불온 국가들’에 경제제재를 남발해온 것이 국제 사회에서 달러 회피 경향의 확산이라는 부메랑 효과를 내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만에 대한 조치들은 대만을 제2의 우크라이나로 만들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에서는 대만 위기가 고조되는 경우 가장 먼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한반도를 상정하고 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요동치면서 얽히고설켜 있다면 외교는 당연히 고도로 유연하여야 하지 않을까? 일본은 G7의 일원으로서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대러 제재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 자신들의 핵심 이익은 양보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작년에 미국 재무장관이 러시아가 전쟁 비용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끔 동맹국들이 부득이 러시아 원유를 구매하더라도 일정 가격 이상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는 ‘러시아 원유 가격 상한제’를 동맹국들에게 촉구하였을 때 일본은 G7 국가들을 설득하여 예외 인정을 받아 내었다. 또한, 일본 기업들은 러시아 사할린 2 에너지 프로젝트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어떤가? 올해 들어 국무장관, 재무장관 및 상무장관이 줄줄이 중국을 방문하여 타협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재무장관은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투매하지 말고 신규 발행 국채를 대량 매입하도록 요청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이다. 미 본토 주변에는 잠재적 적국이 없고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자연적인 방어막이 존재하고 있다. 세계의 여타 지역에서 발발하는 전쟁은 그 나라에게는 재앙이나 미국에게는 단순히 ‘게임’일 수도 있다. 만의 하나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낸 것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설사 우리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가 예상된다. 국민들은 현 정부에 대해 문재인 정부와 같이 종북을 하지 말고 더욱이 적화통일 전략에 넘어가지 말 것을 주문한 것이지 강경 일변도로 나가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2011년에 개봉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최종병기, 활>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는데 주인공에게 자신의 친구 집으로 피신하라고 하면서 ‘외교를 모르는 자들이 임금을 옹립하였으니 반드시 전쟁이 날 것’임을 친구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당시 한족의 명나라가 21세기 미국이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오늘날 중국이나 러시아라고 단순하게 대입할 수는 없지만, 미국의 패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미국인들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러시아 및 중국과 권력을 분점하면서 미국의 상대적 우위 아래 다극 체제의 출현을 용인하기보다는 무리하게 패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열강 사이 무력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미 그 전조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볼 수 있다. 인조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외적으로 존명(尊明) 사대주의를 분명히 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부모의 나라(?)를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는가라는 명분론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을 장악한 세력은 대륙의 정세를 무시하고 명분론 또는 이념에 집착하였다. 그 대가로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현 정부가 혹시라도 '의로운 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인류 역사상 '의로운 국가'란 있은 적이 없었으며 '의롭다' 라는 것은 제국이나 패권국이 사용하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고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국익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