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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인 광복회지부장 "경남, 기미년 독립만세 가장 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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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인 광복회지부장 "경남, 기미년 독립만세 가장 격렬"

이태룡 인천대 박사 "1962년 독립유공자 포상한 지 60여년...적극 발굴 나서야"

"경남지역에서는 일제침략기 의병투쟁이 타지역에 비해 많았고 기미년 독립만세 시위도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고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9년 10월 27일 불순세력의 진주법원 방화로 인해 진주법원(진주지방재판소) 의병의 판결문을 비롯해 3·1독립만세의거·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약하다 붙잡혔던 독립군·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우국지사의 공적이 담긴 기록들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박형인 광복회 경상남도지부장은 23일 오후 창신대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유적지 실태' 학술회의 인사말에서 이같이 피력했다.

▲박형인 광복회 경상남도지부장. ⓒ프레시안(조민규)

이날 또한 이태룡 국립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일제침략기 경남지역 전기·후기 의병에 대한 기록은 국내외 문서에 많이 나타나 있다"며 "기미년 독립만세의거 때 창원 320명·함안 227명·합천 184명·사천 120명·밀양 105명·김해 52명 등 경남에서 순국자 1274명·부상자 2019명·투옥자 5012명이 발생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타도에 비해 월등히 많이 나왔다"고 이같이 밝혔다.

이 소장은 "진주법원(부산지방법원 진주지부·진주지청)에서 1심 재판을 받고 공소(항소)하지 않은 채 옥살이한 독립유공자의 기록은 단 1건도 없다"면서 "1962년 독립유공자를 포상한 지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남도민이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 발굴을 자포자기한 채 살아온 것이 아닐진대 독립유공자 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심지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렸던 진주의병장 정한용조차 관심 부족으로 인해 아직 포상이 안 된 상태이다"며 "일제의 기록에 무수히 나오는 의병, 또한 판결문이 사라졌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다. 국내외 반일투쟁 기록은 일본의 비밀 기록을 찾아 이를 번역하는 작업을 거쳐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발굴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공적을 찾는 일이 단순히 판결문을 찾던 시대는 지났다는 뜻이다.

이태룡 소장은 "경남의 지자체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정부(국가보훈부)에 포상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또한 포상이 이루어져서 만시지탄이나 겨레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독립유공자의 공적이 빛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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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규

경남취재본부 조민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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