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왼손 아닌가? 박지원이 나오면 그 양반 이길 사람이 없을 거요."
4일 오후 전남 해남읍의 버스터미널 앞 택시승강장.
타는 듯한 더위에 지친 택시기사들이 기사 휴게실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기사 A씨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내년 총선에 해남·완도·진도 지역구에 출마한다는 얘기를 들었냐"는 물음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워낙 유명하고 똑똑한 양반이라 나오면 국회의원은 따 논 당상"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어 "정동영, 천정배 다 나온다고 하니 당에서 공천을 줄까 싶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택시 기사는 "나는 며칠전 (박 전 원장 한테)전화도 받았다"며 "내년에 나올테니 잘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고 은근 자랑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맞은편 건물을 바로 보며 "지금 국회의원이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택시 승강장 건너편은 현 지역구 국회의원인 윤재갑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역사무실이다.
해군 군수사령관 출신인 윤 의원은 19대부터 출마해 3수 끝에 지난 2020년 21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내년 재선을 앞두고는 강력한 대항마인 박지원 전 원장의 출마설로 타격을 받은 모습이다.
◇ 역대 국회의원, 인구 많은 해남출신 독차지…진도 출신 박지원이 나선다면?
해남·완도·진도 국회의원 선거구는 원래 해남·진도와 완도·강진으로 나뉘었으나 18대부터 해남·완도·진도로 재편됐다.
이런 정치 지형상 예전 한 지역구였던 해남-진도의 투표성향이 같고, 여기에 완도가 독자 목소리를 내는 형태로 선거가 진행돼 왔다.
인구수는 지난달 말 기준 해남 6만5133명, 완도 4만7068명, 진도 2만9183명으로 해남의 표심이 당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난 18대와 19대 때는 해남 출신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완도 출신의 현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무소속과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서 재선에 성공한 바 있다.
이후로는 줄 곧 해남 출신이 지역 국회의원을 휩쓸었다.
지난 총선에서도 해남 출신의 윤재갑 민주당 후보와 윤영일 민생당 후보가 격돌했다. 민주당 경선에서는 윤광국 전 한국감정원 호남본부장이 나서면서 해남윤씨 종친들 싸움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해남 윤씨가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해남윤씨 종친회 한 임원은 "박지원 전 원장이 내년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관심을 끌지만 종친회 후보도 2명이나 나온 이상 특정 후보를 미는 분위기는 없다"며 "역대 선거에서도 종친회 차원에서는 특정 후보를 위해 움직인 적은 없다"고 중립을 강조했다.
내년 총선에서는 정치 거물 박지원 전 원장이 해남·완도·진도 선거구 출마를 밝히면서 이 지역 뿐만 아니라 광주전남 전체 총선판이 온통 박 전 원장에 쏠린 모습이다.
그간 간접 출마설을 흘려온 박 전 원장은 4일 광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호남연수원에서 열린 광주시교육청 청소년 정치캠프 강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념을 발전시키고 호남 정치의 복원을 위해 내년 총선서 제 고향에 나가기로 했다"며 해남·진도·완도 지역구 출마를 공식화 했다.
이날 강연 이후에는 곧바로 해남으로 내려와 해남매일시장을 방문, 주민과의 접촉을 넓혀가는 등 선거모드로 들어갔다.
그러나 비판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해남에서 민주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40대 B씨는 "박지원 전 원장이 유명한 분이긴 하지만 이제 정치를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면서 "결국 정당 후보자가 되려면 당원을 많이 확보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저렇게 분위기만 띄우는 것은 혹시 비례대표로 가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 "이참에 진도 출신 국회의원 배출하자"…진도, 기대 가득
박지원 전 원장의 출마 소식에 진도는 더욱 들뜬 분위기다. 그동안 인구수에 밀려 진도 출신 국회의원은 염두도 내지 못했던 형국이었다.
밀양박씨 진도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박병학씨는 "소선거구제 이후 진도 출신 국회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며 "정시채 전 의원은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진도로 이사왔다"고 주장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해남·진도 선거구에서 당선된 정시채 전 의원의 공식 프로필에 출생지는 진도이다.
박병학 종친회장은 "밀양박씨인 박 전 원장이 출마한다는 소식에 종친회가 모처럼 활기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진도 전체 유권자의 20% 정도가 밀양박씨 종친들"이라며 "종친들만 힘을 합쳐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진도읍의 한 경로당 회장인 C씨는 "저 분(박지원 전 원장)이 원래 고향일이라면 굉장히 앞장서서 일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지역에서 참 나름대로 평이 괜찮았다"며 "솔직히 나이가 있어 정치를 그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본인이 저렇게 건강 관리하면서 나간다고 하니 누가 만류하겠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진도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할 마지막 기회다"고 은근 기대했다.
◇ "민주당 공천 안주면 무소속 나와도 당선"…완도 '호의적'
인접 완도군은 더 나아가 무소속으로 나가도 거뜬하다는 의견도 흘러나왔다.
호남이 민주당 텃밭임에도 완도군의회는 전체 9명의 의원 중 의장과 부의장을 포함해 5명이 무소속이다.
또 다른 완도지역 민주당 원로당원 D씨는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나이 먹으면 그만하라'는 소리가 오히려 서운하다"며 "박지원이 당에 공천 안주면 무소속으로 나와도 당선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옛 국민의당 완도연락사무소장을 거쳐 현재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E씨는 "현재 국회의원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많으나 다들 중량감이 떨어진다"며 "중앙에서 존재감 없는 초선보다는 박지원 전 원장이 국회에 가면 지역이 더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내년 해남·완도·진도 지역구 총선에는 더불어민주당에서 윤재갑 현 국회의원과 박지원 전 원장 외에도 김병구 변호사, 윤광국 전 한국감정원 호남본부장, 이영호 전 국회의원, 장환석 전 행정관, 정의찬 이재명 대표 특별보좌관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국민의힘에서는 조웅 해남·완도·진도 당협위원장이 출마할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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