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획득한 법적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한 절차인 '변제공탁'에 돌입했다. 정부는 공탁 자체가 피해자의 채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피해자 법률대리인 측은 법적으로 변제공탁을 할 경우 채권이 소멸되는 것이 맞다며 외교부의 조치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3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은 정부 해법을 수용하지 않은 피해자 4명과 상속인 파악이 되지 않아 공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판결금 수령이 어려운 사례가 있어 이들에 대한 공탁 절차를 3일 개시했다"며 "대상자인 피해자 유가족 분들은 언제든지 판결금을 수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6일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 판결로부터 받은 법적권리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가해자이자 피고인 일본 기업은 참여하지 않는 방안을 내놨다. 일본 기업 대신 한국의 재단이 재원을 마련해 판결에 따른 배상금을 원고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채권을 가지고 있는 원고인 피해자 및 유족 15명 중 11명이 정부 방안을 수용했고 생존자 2명과 유족 2명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부의 이번 변제공탁은 거부하고 있는 이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종국적으로 이들의 채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절차다.
정부는 변제공탁에 대해 "민법 제487조에서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아니하거나 받을 수 없는 때 변제자는 채권자를 위하여 변제의 목적물을 공탁하여 그 채무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며 이 조항에 따라 실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변제자인 재단이 채권자인 피해자 및 유족에게 일본 기업 대신 마련한 배상금을 지급하려고 하는데 이들이 받지 않고 있으니 공탁을 통해 채무를 면하겠다는 뜻이다.
채무를 없앤다는 것은 피해자와 유족 입장에서는 곧 채권을 없앤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에 정부에서 이 부분을 인지하고 진행한 것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자동적으로 (채권) 소멸은 아니다. (피해자나 유족이) 공탁금을 받으셔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변제공탁이 유효하다고 판단되면 채권자인 피해자 및 유족의 권리는 소멸된다는 것이 법률대리인의 설명이다.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히로시마 소송의 대리인인 김세은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이날 정부 발표 이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후문에서 기자들과 만나 "변제공탁은 변제를 위해 공탁을 하는 것"이라며 "공탁이 유효하다는 전제 하에 공탁소에 공탁을 하게 되면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돈을 받은 것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것"이라며 정부의 설명이 틀렸다고 밝혔다.
또 다른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정부의 설명이 "아주 기만적"이라며 "채권이 소멸되는 첫 번째 방식이 변제다. 어떻게 변제가 되는데 채권이 소멸되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탁이 유효하다고 인정될 경우 "피고 기업인 일본제철이나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 (원고가) 가지고 있는 채권이 '공탁금 출납 청구권'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여기서 (일본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채권이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채권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재단 측이 현재 대법원에서 계류 중인 집행 사건에 공탁을 완료했다는 공탁서를 제출하게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해 원고 측인 피해자와 유족이 공탁이 유효하지 않으며 신속하게 일본 기업 재산에 대한 현금화를 집행해 달라는 의견서를 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대법원이 당장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몇 년 동안 시간을 끌 수 있는데, 신속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며 "만약 대법원에서 이 부분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면 별도의 소송 절차를 통해 공탁이 무효라는 것을 확인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탁 유효성에 대한 대법원 판단의 관건은 피고인 일본 기업이 아닌 제3자인 재단이 원고인 피해자 및 유족에게 변제하는 것을 인정할 것인지 여부에 달렸는데, 김 변호사는 민법 제469조 '제삼자의 변제' 조문에 따라 재단의 변제가 위법하다고 보고 있다.
민법 제469조 1항에 따르면 "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으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돼있다. 김 변호사는 이에 대해 "피해자가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명확히 한 경우에는 재단의 변제가 유효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그는 또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위자료청구권은 그 성질상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있다"며 채권의 성질상 제3자 변제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변제공탁을 실시한 배경에는 피해자의 채권을 빨리 소멸시켜야 하는 법적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시민단체의 모금 운동을 언급하며 이들 때문에 변제공탁을 실행하게 됐다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현재 대법원에는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상표권과 특허권 각각 2건, 일본제철이 소유한 피엔알 주식 19만 4794주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이 계류돼 있는 상태다.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판결을 내려야 하는 대법원과 배상을 해야하는 일본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변제공탁을 실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에 대해 재단 관계자는 "공탁 문제를 마치 대결 국면에서 무엇인가를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도 왜 이 시기에 변제공탁을 한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일본과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기한을 정해뒀기 때문에 공탁을 진행한 것이냐는 질문에 외교부 당국자는 "그건 아니다"라며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공탁 절차를 부득이하게 거쳐야 하는 분들이 있고 아직 마음이 어려우신 네 분(정부 방안 수용하지 않은 경우)이 계시고 정부가 어렵지만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는 와중에 지난주 일부 시민단체가 시민 모금 활동을 발표한 것 등의 제반 여건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6월 29일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은 정부 방안을 수용하지 않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해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모금이 진행되어 실제 피해자와 유족이 대법원 배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을 경우 정부 방안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이들의 채권이 법적으로 여전히 유효하게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정부가 변제공탁을 실시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한편 원고인 피해자 측은 20~30년 동안 법적 공방을 거쳐 지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획득한 채권을 정부가 나서서 소멸시키려는 상황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정부 방안을 수용하지 않은 피해자 중 한 명인 고(故) 정창희 씨의 유족은 임재성 변호사를 통해 "대법원 판결인데 권력자가 이렇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인가. 나라의 걸림돌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이 유족은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하는데 개인의 인권을 이렇게 유린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황당하기만 하다"라며 "이 상황을 보니 아버지가 어떤 싸움을 얼마나 어렵게 해오셨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의 딸은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사과와 일본 기업의 배상"이라며 "그걸 도와주지 못하겠다면 계속 싸울 수 있게는 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전화 한 번 걸어서 수십 년 간 겨우 쌓아온 판결을 없애면서"라고 밝혔다.
임 변호사는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보다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한 이후에 공탁의 위법성을 다투기 위한 절차들, 그리고 반대하는 피해자들의 의견을 조금 더 명확하게 사회에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후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체댓글 0